유년의 추억
유년의 추억
  • 경남일보
  • 승인 2019.06.0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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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순(수필가)
임정순
임정순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할 새벽녘, 강한 바람과 함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어느새 해가 길어진 여름날의 비는 그동안 가뭄으로 목말랐던 논밭에 단비가 되고 있었다. 빗물을 머금은 식물의 잎은 초록을 싱그러워지고 있었다.

이 맘 때쯤 이면 초로(初老)의 할머니는 세월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 단발머리 소녀가 된다.

벌서 오십년이 넘은 것 같다.

시골의 작은 마을, 실버들이 늘어져 있는 개울을 지나면 논 사이로 오솔길이 있었다. 주변에는 밀밭이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 나의 예쁜 추억이 있다. 그 시절 노을이 진 후 초저녁이 되면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얘기꽃을 피웠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인 줄리 앤드류스가 팔을 펼치며 도레미 송을 부르며 하던 행동을 우리도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따라했다. 그러면서 그게 좋다고 ‘까르르’ 웃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그랬다.

주위에는 어른들과 사내아이들이 밀을 베어 불을 피우고 밀을 구웠다. 아이들은 톡톡 튀는 소리와 밀 익어가는 냄새에 신이 나서 지루한 줄도 몰랐다. 밀 냄새는 코를 자극할 정도로 구수했다. 먹어도 된다는 수신호에 따라 어른 아이 모두 함께 달려들어 밀을 비벼먹었다. 그 밀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간식이었다.

친구들과 사내아이들의 손과 얼굴은 온통 새까맣게 변해 검은 분칠을 한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검은 얼굴을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야단맞을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아련한 유년의 기억이다.

요즘은 들에 나가도 밀밭이 보이지 않는다. 외국에서 밀가루를 수입하고, 돈이 안 될 뿐 아니라 농사지을 사람도 없어서이리라. 특유의 향수를 즐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도내에도 각 지역에 지역축제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옛 정취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밀서리 혹은 사라지는 옛것을 축제에 접목 시켜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옛것을 되살리고 추억을 되새겨보는 아름다운 축제로 거듭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가 이렇게 그리운 까닭은 왜일까? 나이가 들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 맛을 볼 수 없는 유일한 맛이 돼버렸다. 지금의 피자나 햄버거보다 훨씬 더 찐한 자연의 맛이라 더욱더 아련하고 그립다.

임정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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