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향수
잊혀져가는 향수
  • 경남일보
  • 승인 2019.06.1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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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작가)
아이들의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면 할머니는 개울가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하얀 찔레 꽃을 따다가 작은 오가리솥에 밥을 지어 절구에 꽁꽁 찧어서 떡을 해 먹이던 때다. 담벼락을 타고 기어오르던 넝쿨장미가 빨갛게 꽃을 피운 유월이다. 모내기를 시작하려고 보리를 베어 도리깨타작을 한 뒷정리로 겉겨를 태우는 연기가 들녘 여기저기서 구수하게 피어오르던 유월의 고향풍경이 세월의 강 저편에서 아른거린다.

보리를 베어낸 논바닥에 임시로 타작마당을 만든 한쪽에 삼촌들이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만들어 준 볕 가림의 그늘 막 아래서 밀이나 풋보리이삭을 구워서 손바닥이 새까맣게 비벼주던 이맘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그래서 이맘때만 되면 약간 덜 여문 풋보리를 한 번 구워 먹어봐야지 하고 벼르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마침 주말을 맞아 울산에서 온 외손녀와 외손자를 데리고 가끔 가는 산사로 가던 길에 산골 초입에 차를 세웠다. 아직은 덜 익어 노르스름한 보리밭 들머리에 노인이 쉬고 있어서였다.

“보리농사를 지으셨네요.”, “농사는요. 볶아서 물이나 끓인다고 누구시더라?”, “울산서 온 외손주랑 절에 가는 길인데 진주에 삽니다.”, “총명하게 생겼네.” “어릴 때 구워먹으면 맛있었는데 딱 알맞네요.”, “배고픈 시절이라 꿀맛이었지”,“몇 낱 구워먹으면 안 될까요?”

노인은 손주들을 보고 빙긋이 웃으시더니 사륜오토바이에서 낮을 들고 와 능숙한 솜씨로 풋보리 한 움큼을 드르륵! 베신다.

길섶의 나뭇가지와 마른 풀을 모았더니 불을 금방 붙이시고 보리다발 한 움큼을 이리저리 불 위에 굴리며 가뭇가뭇하게 구워서 두 손바닥으로 비벼 겉겨를 후후 불어 날리고 알곡을 내민다. “아니요 이놈들도 직접 해보게요”

시커멓게 된 노인의 손바닥을 보며 머뭇거리는 애들에게 얼른 한 이삭씩을 손바닥에 올려주고 시범을 보였다. 고사리 손에는 서너 낱뿐이다.

노인이 보태 준 것을 혀끝으로 묻혀 조심스레 씹는다. 노인은 간절한 시선으로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맛있지?”하는데 애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벌레 씹은 포정이다. 노인은 고개만 천천히 끄덕끄덕 하신다. 알 듯 한 의미가 서글프게 한다.

이사가 잦은 얘들은 옛 추억과 향수를 갖기나 하려나. 정서마저 메마르게 하는 속절없는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건너편 산에서는 아직도 뻐꾸기가 울건만 보리개떡 위에 두툼한 햄버그랑 치즈범벅의 피자가 오버랩 되며 옛 살던 고향풍경은 페이드아웃 되며 멀어진다.

 
윤위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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