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 미국 남북전쟁이 암시하는 것들
[경일포럼] 미국 남북전쟁이 암시하는 것들
  • 경남일보
  • 승인 2019.06.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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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위(칼럼니스트)
미국의 역사에서 미국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분열과 대립의 역사로 점철된 만신창이의 역사였다. 연방주의자(federalist)들과 반(反)연방주의자(anti-federalist)들의 대립과 1812년의 미·영 전쟁에 대한 찬반 대립, 1819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노예문제를 둘러싼 남북 대립은 급기야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남부의 노예제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민주당과 북부의 노예제반대론자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공화당으로 분리되는 극한 상항에 이르렀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링컨이 북부주민들의 90%이상의 지지로 당선되자 남부지방 사람들은 1861년 2월, 전혀 새로운 국가인 아메리카 남부연합국(The Confederate State of America)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수도도 헌법도 독자적으로 정하고 미시시피 출신의 상원의원 J. 데이비스(Jefferson Davis)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링컨대통령이 취임(3월 4일) 하기 불과 일주일 전쯤의 일이었다. 링컨은 이런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취임사에서 남부군을 향해 “당신들 스스로가 침략자가 되지 않는 한 전투는 없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남부 연합군은 링컨대통령의 취임 한 달이 겨우 지난 1861년 4월 12일 연방군이 주둔하고 있는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포격함으로써 남북전쟁(Civil War)은 시작되었다. 전쟁은 1861년부터 6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쟁으로 사망자는 무려 61만명.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한국전과 월남전당시의 전사자 모두를 합친 숫자보다도 많은 인명손실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링컨대통령은 1862년 9월에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63년 7월 1일, 북군과 남군은 드디어 운명의 게티즈버그에서 만났다. 3일동안 치룬 전투에서만 남·북군 합해 7000명의 전사자와 4만5000명의 부상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북군의 대승이었다. 그 후 4개월 뒤인 11월19일 링컨은 격전지 게티즈버그를 공원묘지로 지정하고 북군과 남군의 구분 없이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했다. 여기서 링컨은 “~새로운 나라(a new nation)로 태어난…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a new birth of freedom)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링컨은 전쟁이 끝나기(1865년 4월9일) 한 달 전인 3월 4일 두 번째 대통령취임사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음이 없이 나라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to bind up the nations wounds) 전쟁으로 상처 입은 모든 이를 돌보는 일에 전력을 경주하자”고 역설하였다. 북군의 사령관인 그랜트 장군 또한 “전쟁은 끝났다. 이제 반란군은 우리 국민이다”라고 외쳤다,

미국정부는 남군이나 북군을 구분함이 없이 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남군의 사령관인 로버트 리 장군에게는 아무런 처벌도 주지 않았다. 반란정부의 데이비스 대통령은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하였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난지 6일째 되는 날 암살당했고 데이비스는 5월10일 체포되었으나 2년뒤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분명히 말해 반란군인 남부연합군을 정부군과 하등의 차별 없이 한 곳에 묻은 것이나 반란의 수괴와 그 사령관을 사면(赦免)해 준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다. 왜일까?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전쟁이 끝나 통일만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전에는 절대 할 수 없다. 어떤 서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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