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 땅이름과 우리 문화
[경일춘추] 땅이름과 우리 문화
  • 경남일보
  • 승인 2019.06.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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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석(대아고등학교 교감)
정규석
정규석

순우리말로 된 땅이름이 아닌 차자(借字)표기나 한자어로 된 땅이름도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를 알 수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진주 서부 지역에는 ‘숙호산(宿虎山)’이 있고, 그 밑에 ‘면호실(眠虎실)’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숯골’을 끼고 있는 숙호산의 이름은 ‘숯을 굽는 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숯을 굽는 산’은 경상도의 강한 방언으로 발음하면 ‘숫을 꿋는 산’으로 되고, 줄여서 ‘숫꿋산(숙꾸산)’으로 된다. 한글이 없던 오랜 옛날에 ‘숙꾸산→숙호산(宿虎山)’으로 차자(借字)표기를 할 때, 잘 숙(宿), 범 호(虎) 자를 넣어 ‘호랑이가 잠자는 산’이라고 하였다.

숙호산 자락에는 ‘면호실(眠虎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호랑이가 출몰하기 어려운 평지부근의 조그만 마을이지만, 이름은 호랑이가 졸고 있는 마을이다. 숙호산과 연결시켜 지은 한자어 이름으로 보인다. 이름만 들어도 숙호산과 이 마을 주변에는 귀신이나 나쁜 역병이 얼씬도 못할 것이다. 옛날 민화에도 보면 액운을 막기 위해 호랑이를 즐겨 그렸다.

숙호산과 면호실이 속해있는 행정구역이 ‘이현동(二峴洞)’이다. ‘이현동’은 과거에 ‘두우개’로 불렸다고 해서 일제강점기 때 ‘두 개의 고개’라는 뜻으로 만든 한자어 이름이다. 그러나 옛날에 높은 언덕이나 산을 우리말로 ‘마루(또는 말)’라고 했는데 두우개는 ‘마루-(고)개’의 차자(借字) 표기로 판단된다. 한글이 없던 오랜 옛날에 한자의 뜻과 음을 모두 빌려서 ‘말 두(斗), 소 우(牛)’를 써서 ‘말우(마루)-(고)개’를 표현하였는데, ‘두(斗)’는 ‘북두칠성’을, ‘우(牛)’는 ‘견우성’을 가리킨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보면 ‘선사를 띄워 내여 두우(斗牛)로 향(向)하살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신선이 탄다는 뗏목을 띄워서 북두칠성 견우성으로 향해 볼까’라는 말이다. 북두칠성과 견우성은 우리 조상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별들이다.

이처럼 차자표기나 한자어로 된 땅이름들은 유래를 깊이 연구해야만 조상들의 정신문화를 알 수 있을 만큼 어렵다. 결국 우리말로 된 땅이름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2014년 1월부터 도로명주소가 전국적으로 전면 도입됐다. 진주의 경우 그 당시 국어학자와 시의원 등 여러 관계자들이 모여 도로명을 채택하였는데, 이중에는 범골로, 사들로, 에나로 등의 우리말 이름도 있다. 처음엔 생소하였으나 지금은 익숙하고 정겹게 들린다. 우리말 도로명을 채택한 관계자 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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