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3]한국 기업가정신 발원지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1)
일취월장 진주경제[3]한국 기업가정신 발원지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1)
  • 정희성
  • 승인 2019.06.2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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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해 그것을 실현시키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해, 하나하나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갈 때, 더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의 흥분과 긴장과 보람 그리고 가끔 겪는 좌절감은 기업을 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실하게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이 활기에 넘쳐 일에 몰두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에 화차와 트럭에 가득채워 실려 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러한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광경을 바라 볼 때야말로 바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 없이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기업가의 이러한 끊임없는 도전과 의욕이 국가경제발전에 하나하나 초석이 되고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일제시대, 신생독립국가, 6.25동난,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등 민족과 국가의 수난과 격변의 시대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기적의 한국경제를 일꾸었던 기업가들의 정신이다. 위기의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해서 이들 기업가 정신의 뿌리를 찾는 것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다.

진주 중앙시장에서 구인회포목상점으로 첫 사업을 시작한 진주 보부상 출신 LG 창업주 구인회와 아들 구자경, 지수 만석꾼이자 LG의 동업자인 GS 창업주 허만정과 아들 허준구 등 한국을 대표하는 두 그룹의 창업주들이 꿈을 키우고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기업가정신의 발원지인 진주 지수면 승산리에 대해 알아본다.

승산마을 위치도

 
삼성 LG 효성 창업주 생가 위치도.

 
승산마을 항공사진.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550년 전 김해 허씨가 세거한 이래 300년 전부터는 능성 구씨가 이거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유서 깊은 곳이다.

이 한마을에서 수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실용적 실천을 주창한 남명 조식선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에 뿌리를 둔 유학자들의 근검절약과 사람존중의 기풍이 오늘날 기업가정신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철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장이 기자 시절 LG그룹의 창업 1.5세대라고 할 수 있는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회고록을 정리하는데 자문하였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구인회(具仁會) LG 창업 회장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수초등학교(14회)를 졸업하고 진주중고- 진주사범학교를 나와 5년간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이사로 합류했다. 1970년~1995년 럭키금성그룹 회장으로 있으면서 취임 당시 매출 260억원이었던 그룹을 30조원 규모로 키웠다. 1995년 1월 럭키금성 그룹의 명칭을 LG그룹으로 바꾸면서 첫째 아들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스스로 물러났다. 같은해 2월부터 LG그룹 명예 회장으로 있다.사실상 오늘의 LG그룹을 만든 창업 1.5세대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고향 진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구자경 회장이 생가에서 찍은 사진. 사진출처=머니투데이


한국의 대표적 혁신적 기업가 구자경 명예회장은 고향 승산리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구자경 LG명예회장이 밝힌 고향 산천 ‘승산리’

나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 3월 25일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慶尙南道 晉陽郡 智水面 勝內里)에서 부친인 연암 구인회(蓮庵 具仁會)공과 모친 김해 허씨(金海 許氏)사이에서 6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선친은 서울에서 유학 중이었으므로 나의 출생을 가장 반긴 분은 증조부인 교리할아버지였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승산마을은 승내리의 중심 마을로서 상동(上洞)에는 구 씨가, 하동(下洞)에는 허 씨가 대를 이어 문중의 번성을 일구어왔다. 예부터 이곳은 천석꾼 만석꾼 부자가 많아서, 서울에서도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알았다고 할 만큼 융성함을 누렸던 고을이다.

나의 향리는 소백산맥의 정기가 남쪽으로 내려 뻗은 경상남도 서남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조의 유명한 지리책인 ‘택리지(擇里志)’는 이 지역의 풍수를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

이름난 산맥이 끊어진 곳에 인물이 많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태백산맥의 허리를 틀어 뻗은 발치와 소백산맥이 끝나는 우단 자락의 진양(선친인 구인회(具仁會) 창업회장), 의령(삼성그룹 이병철(李秉喆) 창업회장), 함안(효성그룹 조홍제(趙洪濟) 창업회장)에서 재계 3인의 출생이 나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을 지리산의 지맥인 방어산이 뒤를 받치고 마을 앞으로는 염창강이 굽어 도는 승산마을의 아름다운 풍광과 산수 속에서 보냈다. 해발 320m인 방어산은 봄에는 신록이,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산이었다. 학교에서 길게 잡아도 한 시간이면 족히 걸어 오를 수 있었으니 언제든지 마음만 있으면 쉽게 나설 수가 있었다.

산의 중턱부터 꼭대기까지는 온통 바위로 덮여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지만 정상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하나있어서 더위와 갈증을 단번에 날려버리곤 했다. 또한 우물이 있는 쪽 아래로는 소나무와 칡넝쿨들이 엉켜져있는데, 그 바로 아래쪽에 증조부 만회공(晩悔公)을 모신 산소가 있다. 이처럼 방어산과 월아산, 그리고 마을 뒤로 능선을 내린 보양재와 구슬재도 내 유소년 시절을 푸르게 해준 곳이다.

진주와 진양을 감싸듯 흐르는 남강(南江)에도 많은 추억이 서려있다. 유년기 때 친구들과 어울려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고 배가 고프면 강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수박밭에 들어가기도 했다. 남강은 지리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에 이르는 데, 마을 앞을 흐르는 염창강은 남강의 지천이었다.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14년 동안 지수에서 보낸 유소년 시절의 추억은 온통 산과 들, 강으로 쏘다니며 뛰고 놀았던 기억들뿐이다. 추운 정월에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연을 띄우고,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탔다.

열심히 썰매 질을 하다보면 옆구리의 맨살이 다 드러나는 데도 추운 줄을 몰랐다. 누가 빨리 썰매를 지치는지 시합도 하고, 썰매를 탄 채 쓰러뜨리기도 하면서 저녁 어스름까지 얼음을 지치곤 했다. 그런데도 춘강공(春岡公) 할아버지는 놀기만 좋아하는 손자에게 늘 관대하셨다.

당신께서 바빠 손자와 놀아줄 수가 없을 땐 연을 만들고 띄우는데 필요한 실과 얼레 등 필요한 재료를 사라고 돈을 주시기도 했다. 하동 마을에서 매월 2일과 7일에 열리는 지수 5일 장날에는 떡 장사, 옷 장사, 소 장사 등 장돌뱅이와 장꾼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시장 풍경 또한 볼만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마을 어귀부터 나팔을 불며 목발 짚고 행진하는 서커스단과 약장사들을 신기해 쫓아다니기도 했다.

풍요롭게 자연 속을 뛰어다녔던 어린 시절은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이었다. 씨를 뿌리면 어김없이 싹을 밀어내는 흙의 신비함에 경탄했고, 절기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지혜도 깨우쳤으며, 그 속에서 굳건히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인내심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훗날 내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고 결국 은퇴 후 자연으로 돌아오게 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자연은 내게 있어 큰 스승이었다. 나의 생각을 자유분방하게 하고 자연 친화적인 삶으로 가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승산마을은 허씨 문중이 부를 일구어 마을이 융성할 때는 늘어선 기와집만도 200여 채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히 마을의 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 승산마을에 능성 구씨가 뿌리를 내린 것은 1700년경이었다. 11대조이신 성재공(省齋公)께서 이 고장의 만석꾼인 허 병사의 딸과 결혼,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이 혼인은 학자이자 행정가로 명망이 높았던 10대조 예곡공(禮谷公)께서 상주 현감으로 계셨을 당시 허 병사로부터 청혼을 받음으로써 첫 사돈의 연(緣)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예곡공이 한양으로 귀임령을 받아 올라가게 되셨는데도 성재공은 남아서 부인 허씨의 친정마을에 기거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김해 허씨와는 여러 차례 혼인이 거듭되면서 양가의 연을 돈독히 했는데, 특히 내게 있어서는 선친(蓮庵)께서 모친(許乙壽)과 결혼하심으로 외가가 되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하동에는 허씨가, 상동에는 구씨가 중심이 되어 살면서 문중의 번성을 이루었다. 하동에는 재(財)가 성해 부자가 많았고 상동에는 학(學)이 세어 벼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허가 열 사람이 구가네 한 사람을 못 당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상동의 구씨 문중은 청렴결백했고 주로 벼슬을 많이 한 반면, 하동에는 벼슬보다 재를 크게 일군 사람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성재공 이후 문중이 자리를 잡고 번성하는 데에는 증조부 만회공 어른이 두드러지셨다. 고종 때 오른 교리라는 벼슬은 옥당(玉堂)이라 불릴 만큼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가장 탐내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낙향하신 후 교리 할아버지께서는 창강정사에 은거하시며 일체의 외출을 삼갔다. 일가의 문상과 같이 긴히 외출을 할 때는 왕 갓을 쓰셨다. 승산 밖을 나가신 것이 딱 한 번,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손자(蓮庵)의 초청을 받아들여 진주로 나가셨을 뿐이다.

LG ‘인화경영’의 발원지 모춘당(慕春堂)

승산마을에는 집안의 가풍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럿 남아 있다. 남촌에는 선비들의 교류장이자 학문도장으로 증조부가 주축이 되어 지은 창강재(滄江齋)와 후손들이 공부하던 양정재(養正齋)가 한 울안에 있다. 양정재는 성재공 할아버지를 사위로 맞을 때 허 병사가 지어준 살림집이었다. 또 증조부를 추모하는 기념관으로 방산정이 있고, 조부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모춘당(慕春堂)이 있어 고향을 찾을 때마다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방산정은 조부께서 선친과 함께 4칸 크기로 지었던 것을 터가 좁아 동향으로 옮겨지었고, 모춘당은 조부의 추모당으로 뿐 아니라 자녀들의 교육과 가풍을 익히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나의 대에서 새로 건립했다. 6.25때 불타 없어진 내 생가가 있던 자리다.

 
모춘당


모춘당을 지은 후에는 집안에 새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1년에 한 번 그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여 이곳에서 가풍을 익히도록 했다. 이 행사는 주로 안사람이 주도하는데, 조상을 기리는 곳에서 함께 자며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춘당의 눈에 가장 잘 뜨이는 곳에 증조부께서 내리신 가훈이 걸려있다.


-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껏 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 덕 좋아함을 색 좋아하듯 하고 악을 보면 끓는 물 보듯 하라.
- 선조에게 제사하는 날에는 반드시 엄숙하고 조심하여라.
- 나의 정성과 공경 다하면 혼령이 앙양하게 계신 듯하리.
-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 자손이 착하지 못하면 조상을 욕되게 하기 쉽다.
- 선대 훈계를 삼가 이어서 바르게 할 뿐 변하지 말라.
- 아득하게 어두운 세상을 만나면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겨라.
- 두려워해서 스스로 조심함이 깊은 못을 만난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할 만큼 엄격하지만 이런 덕목들이 가통을 지켜 온 울타리라고 생각된다. 증조부께서는 가훈을 통해 주로 수신의 자세를 가르치셨다. 그 중에도 신계(身計)를 으뜸으로 당부했다. 모춘당은 LG의 최고 기업문화로 자리잡은 ‘인화경영’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연암의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6ㆍ25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새로이 건립했다. 이에 비해 춘강 할아버지는 예의범절과 절약정신을 강조하셨다. 특히 ‘주색잡기를 하지 말 것’, ‘함부로 남의 보증을 서지 말 것’, ‘민사재판 때 소송하지 말 것’ 등을 당부하셨는데 이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라는 의미로 나도 같은 생각이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 기업가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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