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기업가정신 뿌리 ‘진주상무사’
진주 기업가정신 뿌리 ‘진주상무사’
  • 김영훈
  • 승인 2019.06.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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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진주상의 공동기획
(1)백년이 넘는 상인조직

진주 경제성장 주역이자 경제단체의 효시
진주는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LG 창업자 구인회 등 많은 기업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특히 구인회는 작은 포목상점을 운영하며 당시 상인들과 단체를 구성해 진주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이 당시 구인회가 몸 담았던 곳이 바로 ‘진주상무사’다.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진주상무사는 지역 상업계를 이끌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희망을 주며 당시 어려웠던 상황에 힘을 보탰다.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한 진주상무사는 경제적 시각을 넓히는 역할도 했다. 진주 출신의 많은 기업가들이 성공한 배경에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본보와 진주상공회의소는 민족과 함께 성장한 진주상무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계승할 지 논의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진주상무사는 19세기 초반 진주지역의 보부상단의 기원을 두고 결성됐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됐지만 진주상공회의소 설립까지 이어져 온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상인단체다.

특히 조선후기 보부상단은 시장의 발달에 힘입어 조직된 상인조직으로 상인조직의 발전과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중요한 정치조직의 하나로 활약했다.

◇조선시대 상업에 대한 괄시=조선시대 상업 활동은 개항되기 전까지 매우 부진했다.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업신여겼으며 상업을 천한 직업으로 여기던 사상이 사회 전반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중요시하던 사회 풍조 속에서도 상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부상조하는 단결정신을 기르며 굳게 뭉쳤다.

이후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1880년대 초까지 미국 등 열강과의 통상조약의 체결로 거의 모든 항구가 개방됐다. 이로 인해 근대적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전통적인 조선 상업의 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하며 위협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상권 위협에 대한 국가적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게 되면서 개항 이후 자본주의적 시장 침투를 막고 상업 자유화에 밀려 위협을 받게 된 보부상을 보호할 목적으로 1883년 정부에 혜상공국이 설치된다. 혜상공국은 전국의 보부상을 총괄 지배하는 정부기관으로 외국 상인의 불법적 상행위를 단속해 보부상의 권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보부상의 민폐를 근절하도록 했다.

또 도 단위로 조직을 통솔해 나갔는데 진주의 보상과 부상은 경상도를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로 나눈 우도 도반수의 통솔을 받게 됐다. 이 같은 혜상공국의 설치는 각각 별개의 행상조합조직을 형성해 오던 보상과 부상의 합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진주지역에 도시상업을 대표하는 상업기관인 시전(1884년 1월)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시전의 등장으로 동업자들이 모여서 장사에 대해 의논하는 기관인 ‘우도소’가 설치되면서 진주상무사의 전신인 진주우도소가 운영된다. 우도소 설립 후 보상과 부상은 회당 건립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자연스럽게 보부상단 단일적 조직으로 합쳐 운영하게 됐다.

◇보상-부상 하나로 뭉친 ‘진주상무사’=보상과 부상이 통합운영 되던 1894년 보부상단은 정부기관의 군국아문에서 농상아문 관하로 소속이 바뀐다.

갑오개혁 이후 1895년 11월 상무회의소 규례 제정 공포되면서 1899년 5월 12일 상무회의소의 개정 규례에 따라 진무상무사가 새롭게 결성된다.

이에 전국 각지에는 보부상 단체인 상무사가 결성된다. 하지만 현재 관련 자료가 남아 있는 곳은 진주를 비롯해 고령, 창녕, 삼가, 울산, 예덕(충남 예산·덕산), 부여, 홍성 등 많지 않다.

특히 진주상무사는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진주 옥봉동에 사옥(옥봉동 477-4~5번지. 1938년 건립. 진주성 인근에 최초 사옥이 있었으나 1936년 대홍수로 파손되자 현 부지에 재건립)이 보존돼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사무소에도 예덕상무사가 남아 있지만 사당만 존재하고 있어 그 의미는 다르다.

상무사 결성 이후인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을사늑약 후 상인단체에 대한 규칙과 장정이 자주 바뀌며 혼란을 불러 일으키도 했다. 진주에서도 상무회, 제국신입회 상무과 상무조합 등의 이름으로 상인단체가 등장했다.

진주상무사는 전통적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조직의 자존심을 지키며 상부상조정신을 계승하며 조직의 일관성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진주상무사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면서 지역경제의 위축이 이어졌고 지역민은 허탈감에 빠졌다. 이에 진주상무사는 1933년 1월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임원도 상무사 직제로 바뀌면서 지역경제와 지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갔다.

하지만 1936년 8월 27일 진주를 휩쓴 유례없는 홍수로 사옥이 물에 잠겨 훼손돼 다시 세우는 등 운영상의 여러움을 겪기도 했다.

진주상무사 사옥은 당시 진주성 인근 지역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홍수 이후에는 현재 옥봉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옥을 지을 당시 상인들은 상조정신과 단결정신으로 중건에 팔을 걷어 중건 자금을 모으고 대지를 마련해 기와집 2동의 사옥을 다시 세웠다. 모금에 참여한 상인은 123명으로 모두 민족계 상인이었다.

이렇듯 진주상무사는 과거 우도소, 이후 상무사 등의 이름으로 변천을 거듭하며 성장했다.

경술국치 등으로 활동이 위축되기도 했지만 전통적 상인조직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반수와 접장, 또는 영위와 사장 등 임원을 개선했다.

이런 정신은 1939년 진주상공회의소의 설립 때까지 이어지며 현재도 계승되고 있다.

김영훈기자 hoon@gnnews.co.kr

참고문헌=진주상무사(2017,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상의 백이십년사(2006, 진주상공회의소)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하고 있는 진주상무사의 복원 전 과거 모습.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하고 있는 진주상무사의 복원 전 모습으로 지붕 등 일부는 보수작업을 진행했다. 2006년 당시 모습
진주시 옥봉동에 위치하고 있는 진주상무사의 복원 전 모습으로 지붕 등 일부는 보수작업을 진행했다. 2006년 당시 모습
진주상무사 현재 모습. 2011년 경남도문화재자료 533호로 지정됐으며 2014년부터 보수작업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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