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진주상무사, 역사박물관 건립 때 재현·재조명 돼야
[사설] 진주상무사, 역사박물관 건립 때 재현·재조명 돼야
  • 경남일보
  • 승인 2019.06.2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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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짐과 등짐으로 교환경제의 첨병 역할을 한 보부상(褓負商)의 역사는 우리 경제역사의 한 부분이다. 보부상이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총칭으로 자급자족경제와 물물교환경제를 아울러 부르는 말로 자연경제가 발달하면서 그 기반 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부상(負商)은 나무그릇이나·토기 같은 일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등짐장수’라고도 하며 주로 남자들이 담당하였다. 보상(褓商)은 비교적 값비싼 섬유제품, 필묵, 금·은·동 의 금속세공품을 보자기(褓:포:布)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봇짐장수’라고도 하며 주로 여자들로 구성되었다. 보부상의 장시는 조선 시대에, 보통 5일마다 열리던 사설 시장이다. 보부상이라는 행상이 있어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유통 시켜 물건을 사고팔았던 상인이다.

진주는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LG 창업자 구인회 등 많은 기업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구인회는 작은 포목상점을 운영하며 당시 상인들과 단체를 구성해 진주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그 당시 구인회가 몸담았던 곳이 바로 진주상무사다.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진주상무사는 지역 상업계를 이끌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희망을 주며 당시 어려웠던 상황에 힘을 보탠 경제단체의 효시다. 진주 출신의 많은 기업가들이 성공한 배경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본보와 진주상공회의소는 민족과 함께 성장한 진주상무사에 대해 알아보고 그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계승할지 재조명하고 있다.

도 단위로 조직을 통솔한 진주상무사는 경상도를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로 나눈 우도 도반수의 통솔을 받게 됐다. 진주상무사는 1895년 상무회의소법이 제정 때 진주, 곤양, 하동, 남해, 고성, 진남(통영), 함안, 단성, 산청, 삼가, 함양, 안의, 거창, 합천, 초계, 의령 등 17개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보상과 부상의 권익을 보호하고 상업활동을 관장하던 조선후기의 상업기관이다. 1938년 대홍수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진주상무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옥봉동에 사옥(옥봉동 477-4~5)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됐지만 진주상공회의소가 설립 때까지 진주지역의 대표적인 상인단체다. 거상을 꿈꾸며 조선시대 상거래의 중심에 섰던 진주상무사는 진주역사박물관 건립 때 제대로 재현, 재조명되어 재창조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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