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95] 김천 인현왕후길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95] 김천 인현왕후길
  • 경남일보
  • 승인 2019.06.2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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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봐도 비극인 인생, 인현왕후

인현왕후길,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휘어져 있었다. 인공으로 만든 길들은 대개 직선이 많지만 자연 그대로의 길들은 모두 자연을 닮아 휘어져 있다. 말 그대로 곡선이다. 그 곡선은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개인의 삶 자체가 곡선으로 된 길이라면 참으로 고단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희극인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지만, 가까이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바라봐도 비극인 삶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인형왕후다.

당파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된 인현왕후와 인생의 희·비극을 몰고 다녔던 장희빈의 굴곡진 삶 속으로 들어가보기 위해 진주민들레산악회(회장 김종해) 회원들과 함께 김천시 수도산 인현왕후길을 탐방했다. 인현왕후가 평범한 서인으로 강등되어 외가가 있는 상주 인근의 김천 청암사에서 3년 동안 머물렀을 때, 지친 심신을 다스리고 복위를 꿈꾸며 거닐었던 길 9㎞를 김천시에서 인현왕후길로 조성해 놓았다.

굽이굽이 휘어져 있는 인현왕후길에서 ‘왕비-폐위-복위-질병’으로 이어지는 인현왕후의 굴곡진 삶을 만날 수 있었다. 인현왕후길은 지금껏 다녀본 둘레길 중에서 가장 굽이가 잦은 길이었다. 수도산 자락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만든 길이다 보니 굽이가 잦고 휘어짐이 많은 것이지만 어찌 이리도 인형왕후의 삶과 닮아 있는지 모르겠다. 인현왕후가 살아온 삶의 내력을 길에다 비유한다면 이 인현왕후길일 것이다. 굽이진 길이지만 가파른 곳은 거의 없다. 그리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그늘이어서 여름철 걷기길로 안성맞춤이다.


 

 


◇역사의 그늘이 만든 길

인현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이다. 명성왕후가 죽자, 숙종은 궁녀에서 쫓겨나 있던 장옥정을 불러들이고, 제20대 임금이 될 경종을 낳은 장옥정을 희빈으로 봉한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본격적으로 임금을 독차지하기 위한 견제와 질투가 계속되고, 인현왕후 쪽인 서인과 장희빈 쪽인 남인의 당파싸움이 격심해졌다. 어쩌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여자로서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서인과 남인의 권력 투쟁 속에서 희생된 여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현왕후는 착하고 후덕한 왕비이고 장희빈은 악녀로 알려져 있지만, 숙종실록에 의하면 그러한 내용을 하나도 없다. 이는 당파싸움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서인 세력들이 쓴 소설이나 야사 등에 나오는 얘기이고, 정사인 숙종실록에서는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질투하다 왕비에서 폐위되고 5년 동안 폐서인으로 지낸다. 그러다 서인 세력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인현왕후는 왕비로 복위하게 된다. 하지만 폐비 때 얻은 여러 가지 질병 때문에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35세 나이에 승하한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인현왕후 사후 2개월만에 사약을 받게 된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당파싸움의 희생양이기도 했지만, 여성으로서의 투기가 두 사람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고 간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승리자일까?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아니다. 숙종도 신하도 아니다. 남인·서인, 노론·소론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이는 최무수리와 영조가 역사의 승리자라고 한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 싸움에서의 승리자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패배자만 있을 뿐이다. 그저 인현왕후길처럼 굽이굽이 휘어진 역사만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뿐이다.

 
 

 ◇여름철 걷기 명소로 탄생한 인형왕후길

인현왕후길, 곳곳에 인현왕후에 대한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만들어 놓아서 탐방객들에겐 역사 공부와 함께 힐링을 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이곳 청암사로 와서 3년을 머물다 왕후로 복위되어 왕궁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역정(歷程)을 5개의 그림과 해설 안내판으로 소개해 놓았다. ‘인현왕후의 가례식-인현왕후의 눈물-인현왕후와 청암사의 인연-인현왕후의 기도-인현왕후의 환궁’ 다섯 가지 테마를 설정해서 거기에 알맞은 그림과 해설을 덧붙여 오솔길 모퉁이마다 안내해 놓았다. 한참을 걷다가 쉴 참이 되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탐방객들의 발걸음 앞에는 안내 표지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여름 더위에 지쳐갈 무렵, 무흘계곡의 맑은 물이 탐방객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쉬었다 가라고 부른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한참동안 발을 담그고 있으니 이곳이 신선이 사는 별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계곡에서 나와 다시 숲길로 올라가자 시원한 폭포수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 용이 높은 벼랑을 타고 힘차게 올라가는 형상의 용추폭포다. 높이 17m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 듣기만 해도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이 씻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폭포수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 시름을 달랬을 인현왕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궁중에 일은 장희빈에게 맡겨두고 이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살았다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일이 없이 장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추폭포 바로 위에 구름다리가 놓여있었고, 그 옆에 정자와 함께 무흘구곡 ‘용추’라는 시를 새겨놓은 빗돌이 하나 품위 있게 서 있었다. 이곳에서 수도리주차장까지의 800m는 포장도로였다. 팍팍한 아스팔트길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숲속으로 난 인현왕후길에서 만난 파란만장한 한 여인의 삶을 생각하면서 걸으니, 더위도 잊은 채 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 굽이굽이 휘어진 인현왕후길, 어찌 인현왕후 한 사람의 인생만 그렇겠는가, 모든 삶이 곡선이다. 그 휘어진 길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가꾸어가는 건 ‘나’ 자신이다.

/박종현 시인, 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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