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첩실기(고경숙)
[강재남의 포엠산책] 첩실기(고경숙)
  • 경남일보
  • 승인 2019.06.3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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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실기/고경숙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동거가 시작됐다

음습한 곳에 난 종기처럼

주인영감은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만

그녀를 풀어보았다

침목처럼 누워 바라보는 별빛이

흔들흔들 화물차 몇 량을 보내고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아이가 태어났다

조용히 숨죽이는 호흡 아래

철로에서 몇 차례 넋을 잃었다

바람에 동승하고 싶었다

슬찌끼미 같은 안채의 내방이

그 집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하게 선 긋고 가는 밤이면

감나무 이파리도 후둑거리며

등짝을 쳤다

서러운 너머의 것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아이가

분 젖통을 찾아 그녀를 풀던 새벽녘,

영감 대신 화물차 한 량 온몸으로 받으며

침목처럼 그녀가 거기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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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깊어간다. 그럼에도 산 아래 터를 잡은 이곳은 계절 감각이 무디다. 늦은 봄처럼 가을의 초입처럼, 새벽바람에서 다른 계절 냄새가 난다. 얇은 카디건을 덧입을까 행동으로 옮기는 못하고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나는 한통속에 속하지 못한 서러운 것들과 닮아서이다. 계절이면서 제 계절이 아닌듯한 것처럼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시절을 살아냈던 때가 있었다. 누구도 없는 한밤중에만 나를 보여주어야 하는 일,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고운 날은 고운대로 설운 날은 설운대로, 감나무 이파리가 등짝을 후려쳐도 파랗게 질리지 않아야 할 그런 때가 있었다. 바람에 동승하여 떠나고 싶은 마음과 침목처럼 누워 별빛이나 헤아리며 안착하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싶은 어미의 마음까지. 안채에 아이를 앗기고 그곳으로 눈길도 주지 못하는 나의 시간이 감나무 그늘에 묶였다. 안채와 바깥채의 선을 그어 스스로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숙명이라면 그 숙명은 누가 내게 주었단 말인가. 화물차 한 량 온몸으로 받으며 누워있는 새벽, 문창으로 달빛이 쏟아진다. 적멸보궁이 눈앞에서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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