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추억을 쌓다[4]덕미양화점 김용문 아재
시장 추억을 쌓다[4]덕미양화점 김용문 아재
  • 백지영
  • 승인 2019.07.0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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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외길이라 구두 말고 다른 일을 가져 본 적이 없어”

믿음만으로 시작된 구두장이의 삶
“돈이 중하나? 사람 인정이 중하지”
“이 가게가 내 삶의 터전이자 쉼터”
 
빼곡한 구두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아재와 아지매.


중앙시장 외곽에 위치한 덕미양화점은 시장의 터줏대감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오래된 가게다. 그 연륜 때문인지 인터뷰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시장번영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추천받았다.

시장 공영주차장을 기준으로 큰 도로를 따라 중앙광장 쪽으로 오다 보면 중앙시장 2층 건물이 끝나는 곳이 있다. 그 길로 돌아 들어오면 오래된 재봉틀이 눈에 띄는 덕미양화점이 보인다.

유리 너머 빼곡히 들어찬 구두들 옆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장님이 앉아 계신다.

오래된 휴대용 라디오에선 트로트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가게는 사장님과 건장한 청년만으로도 가득 찰 정도로 아담하다.

가게 주인인 용문 아재는 나름 시장 유명 인사다. 아재는 자신이 나왔던 방송과 신문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중앙시장에 나만치 오래된 사람 없어”라는 그의 말에는 자부심이 한껏 묻어있다.

사실 아재는 크면서 고생을 많이 겪었다. 학업을 이어갈 형편이 안 돼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처음 시작은 담뱃가게 보조였다.

“여기서 재향군인회 회장이 담배 장사를 했어. 재향군인회 사무실 가서 일 보실 때면 장사를 내한테 맡기 놓고 다니셨지”

몇 년 뒤 가게 점원이 그만두자 회장이 김용문 아재를 불러 양화점을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돈이 없어서 안 하겠다는 아재에게 회장은 돈을 대 주겠으니 양화점을 운영해보라 권했다. 아재는 그 때 그 분을 지금도 못 잊는다.

“2년동안 담배가게를 맡기면서 돈을 10원도 안틀렸거든. 그러니까 나를 좋게 보고서는 밀어준 기라. 그분 덕택이지”

빈털터리 몸으로 신용만으로 일군 시작이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돼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왔다.

기술은 진주 극장 앞에 있던 양화점에서 배웠다. 새벽잠 자며 4년간 힘겹게 배웠다. 일일이 수공예 작업이라 손이 안 가는 일이 없었다.

아재는 “옛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못을 쳐가지고 손으로 댕기고, 바닥도 손으로 일일이 짚었고 참 어려웠다”며 그 당시 작업하는 모습을 재연해 보였다.

새벽에 사골국물 먹고 나와 종일 근무하다 밤 11시 30분 통금 사이렌이 불면 집으로 향하는 날이 이어졌다.

몇십년을 그렇게 일했지만 요즘은 구두가 한물가 재미가 덜하다. 그는 “군대 제대한 1962년도부터 15년에서 20년은 괜찮았다”고 회상했다. 외출할 때 구두를 차려 신고 다니던 그 시절이 아재의 전성기였다.

장사를 오래 하다 보면 재밌는 추억거리도 생기기 마련이다.

아재의 기억은 중고등 학생들이 모자 쓰고 학생복 입고 다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주중학교, 진주고등학교에 입구가 하나밖에 없던 그 시절부터 그는 이 자리를 지켰다.

“몇 년 전에 남자 둘이 걸어오고 뒤로 서울 번호판 단 차가 따라오는 기라. 그래가 오더마는 맞다! 기다! 기다! 그카는 기라”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지내온 두 남자는 정년퇴직 후 고향에 내려와 옛 추억을 더듬어 진주고등학교 입구부터 걸어 내려오는 길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담배 사러 오던 두 놈이 자기들이라 쿠데. 여까지 내려오는데 다 간판이 바뀌고 수복빵집하고 우리 가게만 그대로다 카드라고”


 
수십년째 재봉틀을 다뤄온 아재의 손길이 능숙하다.


현재 덕미양화점은 1967년 새로 지어졌다. 과거 건물은 슬레이트 같은 함석으로 지붕을 입은 나무 단층집이었는데 1966년 화재로 싹 타버렸다.

그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공간이 군불 넣은 것 마냥 한 번에 타버린 당시의 일을 아재는 생생히 기억했다.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아재는 이듬해 현재 건물에 어렵게 자리를 잡고 일에만 매진하다 그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집안 형수 되는 분이 집사람하고도 친척이라. 집사람 집안 고모. 그분이 중매를 선기라. 결혼을 31살에 했지. 일한다고 먹고 산다고 당시로는 늦게 한기라. 내가 나쁜 놈 같았으면 집안 형수가 중매해 줬겠어?”

그렇게 만난 아내는 9살 차이가 난다. 아지매는 결혼하고 가게 직원들 밥을 해주며 남편의 일을 도왔다. 나중에는 옛 진주의료원 앞에서 포장마차 일도 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일에 매여 지냈던 지난 시절은 자녀들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았다

“애들 클 적에 가정 교육이 참 무서운기라. 아침에 일찍 나오제, 저녁에 늦게 드가제, 애들 만날 일이 없어. 먹을 거 사 가꼬 애들 자는데 머리맡에 올리 놓으면 일나서 묵고”

살뜰히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반듯하게 자라 준 자녀들을 보면 그저 고맙지만, 당시 좋은 곳에 더 많이 데리고 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애들 클 때는 일 한다고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다리에 힘이 없어서 못 돌아다녀. 계속 앉아 가꼬 작업을 하니까 이게 직업병이지”

눈길은 자연스레 아재의 허벅지로 향한다. 어딘지 앙상해 보이는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집에서 올 때는 걸어 댕ƒ…는데, 요즘에는 무릎 아프제 골반 아프제 그래가꼬 자전거 타고 댕겨. 너무 앉아 있어가꼬”

그래도 아재는 아파도 나올 장소가 있어 좋단다. 나올 곳이 없으면 추워도 더워도 그저 누워만 있어서 별로란다. 이곳이 그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인지 느껴졌다.

“여기가 삶의 터전이고 쉼터지. 좋은 세상 다 가삐고 저세상 갈 때 다 돼가니까 영 파이고만. 나이 드니 아들이 문 열어 주고 닫아 주고 다 해”

그나마 요즘은 손자, 손녀들 보는 재미가 크다. 중학생 손자 자랑을 하는 아재와 아지매 얼굴에는 더없이 인자한 웃음이 묻어났다.

아재와 아지매는 소망도 소박하다.

“이제 돈 벌 욕심도 없고 남 줄 것도 없고 받을 돈도 없어. 손자들 과잣값이이랑 마누라랑 내 다닐 병원비나 벌면 돼. 소망이라 카는 거는 다들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덕미양화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구두 중 정갈함이 유독 눈에 띄는 구두 한 켤레를 꺼내 들어 보았다. 깔창에 덕미제화 네 글자가 선명하다. 아재가 20여년 전 직접 만든 구두라고 한다. 세월이 느껴지지만 짱짱한 모습이 아재를 닮은 듯하다.

글·사진=이준옥 진주중앙시장 청년기록단원·정리=백지영기자

 
이준옥 진주중앙시장 청년기록단원
 익숙한 곳의 새로운 발견 - 이준옥 중앙시장 청년기록단원

처음 중앙시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잘 모르겠다’였다. 일 때문에 자주 가긴 했지만 내부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많은 것을 느꼈다.

‘시장, 추억을 쌓다’를 준비하며 조사를 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자부심에 도취했다. 진주 역사의 산증인인 중앙시장이 진주라는 도시에 화려한 색상을 입혀준 느낌이 들었다.

상인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중앙시장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고리타분하다 혹은 재미없다 같은 과거의 편협한 인식은 사라져만 갔다.

상인들은 시장에 이미 익숙해서 소중함을 잊고 지낼 것 같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사장님의 한마디에 바로 무너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나 건강하나 언제나 여기 이 자리를 지키겠다”는 그의 말이 내 마음을 울렸다.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킨 상인들의 장인 정신이 고스란히 깃들어있는, 누군가에겐 영원한 삶의 쉼터이자 안식처인 중앙시장. 그저 일개 시민인 나는 어떻게 하면 이곳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중앙시장이라는 콘텐츠가 지닌 무한한 힘과 가능성과 이를 든든히 지지해주는 점포·상인·고객이 있는 한 진주의 랜드마크인 중앙시장은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

 
일에 매진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시간을 내 아내와 꽃놀이를 다녀왔다며 16년 전 사진을 보여주는 용문 아재.
‘덕미제화’ 글씨가 선명한 아재표 구두.
덕미양화점 주인 내외와 이준옥 중앙시장 청년기록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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