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4)
[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4)
  • 임명진
  • 승인 2019.07.0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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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에 흐느끼듯 무너지는 진주성
‘진주가 포위당한 지가 이미 3일인데 밖에서는 구원이 없으며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진주 근방 백리 내외에서 수백 명의 군사나마 거느리고 구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 이런 상태로 며칠이 지난다면 진주는 지킬 수가 없어 호남으로 통하는 한 가닥 길에 다시 믿을 만한 방어가 없게 된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오직 한번 죽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선조실록 중 경상우도 관찰사 김륵이 올린 장계

진주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마침내 22일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진시(오전7~9시)가 되자 일단의 적의 기병들이 북산에 올라 진을 펼치고 군세를 과시했다.

진주성의 조선군들은 차분히 적들을 응시하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2차 전투에 나서는 일본군은 더욱 강력해 졌다. 10만이 넘는 압도적인 병력에, 전투경험이 풍부한 지휘관, 최신 무기까지 총동원됐다.

전술도 달라졌다. 1차 전투 당시에는 단 2~3곳으로만 공격해왔던 일본군은 진주성을 겹겹이 포위한 채 일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해자’메우고, 신무기 ‘귀갑차’ 동원

당시 조선군의 가장 큰 방어무기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진주성의 남쪽은 남강이, 주변에는 깊고 넓은 해자가 있었다.

해자는 남쪽의 남강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2차 전투를 앞두고 조선군은 성의 남쪽은 촉석루와 남강이 있어 적이 접근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진주성의 서쪽과 북쪽 방면에 호를 파야 한다고 여겨 해자를 파서 그곳에 물을 담아 두었다.

성의 남쪽과 서쪽, 북쪽이 해자에 가로 막혀 적의 공격로는 동쪽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적들은 조선군이 만들어 놓은 해자의 물을 빼낸 뒤 흙을 채워 메우고 길을 만들었다. 성안의 조선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기어코 해자를 메웠다.

이 해자가 메꿔지면서 일본군의 공격로는 훨씬 다양해졌다. 공격이 여러 방면으로 분산되다보니 이를 막기 위한 진주성 수비군의 전력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전투 병력수의 절대 열세에 놓여 있던 조선군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적의 공성무기도 훨씬 다양해지고 정교해졌다. 일본군은 공성무기인 대나무 사다리와 산대 외에 이번에는 귀갑차라는 신무기까지 동원했다.

귀갑차는 현대의 개념으로는 장갑차에 가까운 무기였다. 4개의 바퀴를 달고 몸체를 얹은 뒤 쇠가죽으로 지붕을 엎었다.

이 귀갑차에 군사를 태우거나 화약을 실은 뒤 성벽 아래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조선군의 화살이 쇠가죽을 뚫지 못했다. 적들은 화약이 든 귀갑차를 폭발시켜 성벽에 충격을 가했다. 수성을 하는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가공할 무기였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일본은 전술적인 측면에서 1차 진주성 전투 패배를 교훈삼아 철저하게 준비했다. 2차 진주성 전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일본군이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주력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날 사시(오전9시~11시)가 되자 적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개경원 산허리에 진을 치고, 한 패는 향교 앞길에 진을 쳤다.

처음 한번 교전해 조선군이 적 30여 명을 쏘아 맞추었다. 적이 군사를 거두고 물러났다.

초저녁에 다시 적이 공격을 펼치자 크게 싸우기를 한참 하다가 이경(오후9시~11시)이 되자 물러갔다. 삼경(오후11시~오전1시)에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가 오경(오전3시~5시)에 물러났다.

◇적의 대대적 공세, 장맛비까지 내려

진주성의 위급함을 알리는 보고가 이어졌다. 의병장 김천일은 연일 구원을 청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경상우도 관찰사 김륵은 조정에 급히 장계를 올렸지만 구원에 나서야 할 조선군과 명군은 보이지 않았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당시 전라감사인 권율이 진주성이 포위되기 직전에 자기 휘하 관군을 모두 철수시켰고, 함안에 주둔하다가 일본군이 몰려오자 전라도로 물러갔다. 명군이 자기들의 손실을 우려해서 공성론에 안일하게 생각하고 진주성 지원을 안 한 것이 큰 책임이지만 만약에 조선군과 의병이 총동원돼 진주성 구원에 나섰더라면 명군도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주성 구원조차 시도하지 않은 것은 문제였다”고 말했다.

싸움이 길어지고 있었다. 특히 한여름 장마철에 비까지 내리면서 진주성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화약이 젖으면서 조선군의 주력무기인 대포의 위력이 반감되고 활시위도 늘어졌다.

메워진 해자, 절대 열세의 병력, 오지 않는 구원군, 그리고 더욱 강력해진 적, 이것이 2차 전투 당시 진주성이 처한 극한의 상황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마치 철옹성 같았던 진주성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진주성의 동문 부분의 방어력이 취약해 성의 방어에 어려움이 가중됐다. 동문은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꼽는 지역이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가장 격전지는 동문 방면이었다. 이 동문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이를 간파하고 줄기차게 공격해 들어왔다”고 말했다.

지금의 장대동 어린이 놀이터 부근으로 추정되는 진주성 동문 부근은 주위의 지역보다 지대가 낮은 곳에 있고, 성벽이 동서로 넓게 벌려져 있어 방어 자체가 쉽지 않았다. 줄기차게 내리는 장맛비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강동욱 진주문화사랑모임 상임이사는 “동문은 성을 확장해서 쌓은 것으로 2차 전투 당시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주위의 지역보다 낮은 곳에 있고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고 동쪽 부분이 물이 괴는 진흙땅에 위치해 있어서 성벽이 탄탄할 수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장맛비로 동쪽지역의 지반이 한때 무너지면서 진주성 방어에 어려움이 더 가중됐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대사지

대사지는 진주성을 둘러싼 해자와 비슷한 호안으로서 군사방어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사지의 위치는 지금의 진주경찰서와 진주교육청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진주교육청 청사 앞에는 이곳이 과거 대사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에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남쪽과 서쪽으로 남강이 흐르고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사지가 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대사지는 삼국시대 때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대사지는 북쪽 성벽을 다라 3개의 연못으로 형성된 깊은 늪지대였다.

그러므로 진주성 방어에 1차적인 수성역할을 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하는 요인이 됐다. 그러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왜군이 대사지의 연못을 매립해 큰길을 만든 후 진주성을 공략해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사지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5~1936년 일본인 읍장에 의해 완전히 매립됐다. 지난 2009년 옛 배영초교 부지에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진주성의 북쪽 호안인 대사지와 호안석축 등이 발견되면서 대사지의 존재가 실제로 확인됐다.

 
진주성의 지형도를 일부 확대한 지도. 자료제공=김준형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19세기 진주성도 위에 그려진 1차 진주성 전투 병력배치도./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19세기 진주성도 위에 그려진 2차 진주성 전투 병력배치도./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대사지, 조선 영조 재위시대인 1757~1765년 전국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펴낸 전국 읍지인 ‘여지도’ 중 진주목지도.
조선 영조 재위시대인 1757~1765년 전국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펴낸 전국 읍지인 ‘여지도’ 중 우병영지도. 파란 색 부분이 대사지.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일본군 배치도. 자료제공=김준형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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