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곡직의 손흥민
불문곡직의 손흥민
  • 경남일보
  • 승인 2019.07.0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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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교수)
축구는 프로 복싱이 사양화해도 건재한 스포츠였다. 우리나라에선 국내형 스포츠로서 고교 야구와 프로 야구의 거센 도전을 받았어도, 축구가 국제적인 수준의 스포츠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축구가 오랫동안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은 이유는 이분법적인 단순성의 미학이 아닐까, 한다. 시간과 공간의 활용, 힘과 아름다움의 감수성, 곧음과 굽음의 조화로움….

우리나라 축구의 역사에서 한 동안 직선파가 주류를 형성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직선파는 이회택과 박이천이었다. 사실상 이들이 한국 축구를 국제화시킨 첫 세대였다. 스피드와 힘을 앞세운 직선파에 비하면, 유연성과 기술로 경기에 임하던 곡선파는 찬밥 신세의 서자(庶子)에 다름없었다. 내가 아는 최초의 곡선파는 정강지였다. 그는 진주 출신으로 미남 선수였다. 1970년 언젠가 국제 경기에서 2대0으로 이길 때 두 골을 넣어 파문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는 축구 선수로서는 최초의 오빠부대를 거느린 선수였다. 하지만 기교는 출중해도 체력이 약해 경기의 반만 뛰었다. 이 반쪽 선수가 우리나라 축구 곡선파의 잔혹사에 첫머리에 놓였다.

차범근은 우리나라 직선파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선수였다. 직선으로 뻗어가는 힘은 타의 추종의 불허했지만 곡선의 유연함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힘이 장사인 그의 아들 차두리 역시 그랬다. 차범근 시대의 곡선파를 대표하는 선수로는 이영무와 허정무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선수가 합작한 A매치 골은 57골(185경기)이었다. 차범근의 58골(136경기)에 하나 못 미쳤다.

1970년대에 태어난 곡선파는 최문식·윤정환·안정환·이관우이다. 이들은 주로 1990년대에 활동했다. 이 시절에 세계적으로 압박축구가 도입되어 국제무대에서는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최문식은 고교시절에 이미 효창운동장의 마라도너였고, 윤정환은 테크니션 잔혹사를 대표하는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이관우는 세계적으로 드문 유형의 선천적인 양발잡이로서 현란한 발기술을 구사했지만, 곡선파 중에서 그런 경우가 많듯이 풀타임보다 하프타임을 소화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슈퍼스타로 성공한 이는 안정환이다. 그는 유연하고도 현란한 몸놀림에다 반박자 빠른 슈팅으로써 잔혹사의 종지부를 찍고 한국 축구사의 새로운 테크니션의 길을 개척했다. 그를 계승한 이가 있다면, 아쉬운 대로 기성용 정도이다.

그러면 지금 영국의 프로무대에서 활동하는 손흥민은 어떤가?

얼마 전에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있었다. 토트넘이 리버풀에 지는 바람에, 손흥민이 필생의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물거품이 되고만 아쉬운 경기였다. 경기가 시작된 지 1분도 되지 않아 수비수가 팔을 옆으로 들었다. 왜 저러지? 뭔가 불길한 예감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대 선수가 의도적으로 팔을 맞혀 PK를 공짜로 얻어냈다. 토트넘은 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경기를 지배하고도 지고 말았다.

손흥민은 일단 저돌적이다. 그의 용모는 저돌적인 공격수라기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박사과정에 재학하는 부잣집 아들 같다. 그는 저돌성 외에도 보기 드문 창의성이 있다. 축구를 많이 본 사람만이 이 창의성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직선과 곡선을 묻지 않으니, 불문곡직이요, 곧음과 굽음을 가리지 않으니, 종횡무진이다.

그의 축구 스타일이나 그가 이루어놓은 결과는 차범근과 안정환 둘을 합쳐놓은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해도, 앞으로 기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장래와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두 사람의 합을 능가할 것이라고 본다. 불문곡직의 합은, 이와 같이 역사 발전의 변증법을 완성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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