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5] 연암 구인회의 기업가 정신(1)
일취월장 진주경제[5] 연암 구인회의 기업가 정신(1)
  • 정희성
  • 승인 2019.07.0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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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도전과 개척정신이 만든 ‘LG’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5>연암 구인회의 기업가 정신

“우리 럭키는 이제 이만한 일꾼이면 무슨 일을 못하겠나. 옛날 중국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태산을 옮기기도 했다는 데 이 훌륭한 인재집단이 우리 산업계에 큼직한 기둥 하나 못 세운다면 말이 안되지.”

연암 구인회 창업주가 측근 간부들에게 자주 강조한 말이다.

 
연암 구인회 회장. 사진제공=한국경제신문.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우공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불편하게 생각해 옮기기로 결정하고 자손 대대로 흙을 파옮겨 마침내 태산의 위치를 바구어 놓았다는 이야기다.

무슨 일이거나 집념을 가지고 줄기차게 노력하면 기필코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고사이다. 연암은 한번 결정하면 전력을 투입하고, 10년은 견뎌내야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어떤 약속이나 한 번 하면 반드시 지켰는데, 결코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돈이나 친구가 하는 일을 빼앗거나 훼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금기로 알았다. 기업의 정도(正道)는 창의와 노력으로써 새로운 부를 창출해나가는 것이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자본재에 투기함으로써 불로소득을 얻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고한 신념이었다.



◇도전과 개척주의

연암은 오늘의 LG그룹의 창업한 기업가이다. 일찍이 영남의 토지자본을 상업자본화하고 나아가서는 산업자본화한 20세기의 대표적 기업가이다. 그는 1907년 8월 27일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연 수확 300석 정도의 지주 구재서와 진양 하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만회공 구연호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그래서 구교리댁으로 통했다. 연암은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3세가 되던 1920년에 만석군 집안의 김해 허씨(허을수)와 결혼했다.
“신념이 있을 때 인간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손대지 못하는 사업을 착수해서 성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인가 생각해 봐라. 늬들 생각은 어떻노?”
연암의 도전과 개척정신이 물씬 풍기는 대목이다. 그의 전 생애는 ‘창업과 개척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의 도전과 개척주의 신념은 첫째 유교적 인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당시로서는 택하기 어려운 상업의 길로 투신하는 도전정신, 둘째는 락희의 창업과 화학공업, 전자공업의 새지평을 여는 도전과 개척주의 정신, 셋째로는 기간산업의 개척과 성장 등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1961년, 故 연암 구인회 회장이 국내 최초 국산화 자동전화기(모델명:GS-1)로 시험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

 

연암이 최초의 상업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포목상이었다. 포목상을 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당시 진주는 '유행의 도시요 소비의 도시’였다. 도시는 사람들로 붐비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런 관계로 기생들과 돈많은 여인들의 사치는 비단과 외국의 포목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충분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당시 진주에 살면서 러시아 석유특약점 가게를 차리고 있는 일본인의 동기부여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연암은 포목상의 경우 일본인 상인과 경쟁해서 성공할 큰 업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농공상적 직업차별의식에서 완전히 탈피했고 사업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욕망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 연암은 집안의 반대를 설득해 1931년 7월 25살에 동생 구철회와 함께 자본금 3800원으로 진주 식산은행 건너편의 2층 건물에 ‘구인회상점’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리고 1932년 11월 연암은 부친 소유의 토지를 담보로 8000원의 융자를 받아서 경영규모를 확대했다.

1931년에 설립된 구인회 상점 모습.
그는 값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 자를 속이지 않고 신용을 쌓아 갔으며, 포목을 비수기에 싸게 매점했다가 성수기에 비싸게 팔아서 이윤을 올렸다. 농사의 풍흉에 따라 포목의 유효수요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강우량과 모내기 실적 등을 유심히 관찰해 포목경기를 예측했다.

1936년 7월 남강이 범람하는 대홍수로 인해 진주의 전 시가지가 물 속에 잠기는 병자년 침수피해가 있었다. 구인회상점도 침수됐으며, 겨우 몸만 건져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연암은 모든 재산이 휩쓸려 갔는데도 남들같이 절망하지 않았다. 고객으로부터 얻은 신뢰와 거래처와 맺어온 신용, 그 동안 어려움 속에 쌓아온 경험, 재기의 도전정신과 집념의 개척주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는 위기 뒤에 오는 기회를 잡았다. 연암은 대홍수 뒤의 풍작에 따른 포목경기의 상승을 예견하고 거금 1만원을 빌려 포목을 매점해 호경기에 팔아서 많은 이익을 올렸다. 그 이듬해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시의 특수 경기를 예측하고 매점해 큰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비단이나 인조견직물에 수를 놓거나 무늬를 염색해 파는 등 소비자들의 선호도를 조사해 그것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매상을 크게 올렸다.

포목상 경영으로 구인회상점이 한창 번영하고 있던 1940년 6월 연암은 사업영역을 넓히기 위해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변경하고 주식을 발행하는 등 근대적 경영체제를 갖줘 나갔다. 이 무렵 구인상회는 예금 잔고가 무려 40만엔에 달했다.

일본의 경제통제가 강화돼 무역업을 단념하고 통제에서 제외된 청과물과 어물거래에 투자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이 사업도 어려워졌다.

그는 이때 은행예금을 모두 찾아서 진양, 의령, 함안, 고성 등지의 토지에 투자했다. 해방이후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고 보다 넓은 곳으로 진출할 계획세웠다. 진주의 구인상회를 정리하고 부산으로 사업터전을 옮겼다. 연암은 ‘지구상에 여성이 있는 한 화장품은 영원하다’는 판단하에 화장품사업을 결심했다.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해 럭키표 크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50년 6.25 전쟁은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나 겨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모으는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다.

그런데 락희화학은 운이좋았다. 서울에 공장을 둔 경쟁 화장품 회사들이 모두 생산시설이 파괴됐고, 부산에 공장을 둔 락희화학은 전쟁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어서 생산이 멈추지 않았고 도약할 수 있었다. 이로인해 락희화학은 한국전쟁이후 화장품업계를 제패했다. 물론 락희화학이 반투명크림이나 원료를 혁신적으로 개선해 품질을 높였던 것도 크게 한몫을 했다.

 
락희화학공업사.
럭키크림.


다시 한번 연암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발휘된 것은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해 전자산업에 진출한 것이다.

락희화학이 수년동안 축적안 플라스틱 기술로 라디오 케이스를 상상부문 자력 생산할 수 있었고, 전자공업의 발전 전망이 밝다는 점, 독일 기술자를 유치해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판단하고 결심한 것이다.

 
골든스타 라디오.

 당시 전자산업으로 진출은 지난 10여년간 화공분야에서 전력투구를 다한 연암의 일대 용단이 아닐 수 없었다. 연암은 당시 전축으로 음악감상을 하고 있는 기획실장에게 “하이파이 전축이라는 것이 그래 재미 있어요. 우리가 그거 한번 만들어 봅시다. 우리나라에서 전자공업에 손댄 사람 누구 있어요? 기술이 없으면 외국 가서 기술 배워오고, 그래도 안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것이 아니요. 전자공업 해봅시다. 우리가 개척자가 되는 것이요.”

연암은 “신념이 있을 때 인간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기업 경영활동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에게 주지시켰다. “할수 있다. 하면 반드시 된다”라는 신념을 향상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신념은 할아버지에게 포목장사의 허락을 받고, 아버지 춘강공이 2000원을 주면서 “너는 스물 다섯,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유가의 전통적 사상을 기본으로 한 근대적 자본주의 길을 상업으로 시작했던 연암은 항상 가풍의 생각속에서 새로운 사업을 도전하고 개척 할 때마다 반드시 해내고 만다는 신념을 그는 이렇게 가졌다.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 일단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성공하더라도 거기서 머물지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 한층 큰 것, 보다 어려운 것에 새롭게 도전하라”, “나는 결심했다. 이런 사업이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사업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의 생활필수품은 절대 부족한 실정 아닌가 말이다. 생산업자가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게 만들어 내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고 전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인 기라. 그래 나는 이 플라스틱 사업에 뛰어들 결심이다. 늬들 생각은 어떻노?”



◇ ‘인화(人和)’ 서로 믿고, 이해하면 불가능은 없다

연암의 경영철학은 첫째 인화단결, 둘째 신뢰감, 셋째 책임감, 넷째 무한한 가능성의 인정 등이다. 연암은 특히 이중에서 ‘인화(人和)’를 이렇게 중시했다.

“기업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활동이다. 기업을 하는 데는 내부의 인화가 무엇보다 서야 한다. 인화로 단결하면 무엇인들 불가능하겠는가. 만사가 모두 잘 되더라도 인화가 깨지면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도리이다. 인화가 기업경영의 근간이다. 우리 6형제에게선 서로 기대어 살겠다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 없다. 얼핏 정이 없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나,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아니,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항상 마음이 편하고, 서로의 우애가 손상될 일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풍이 발전 전이하여 인화(人和)를 중히 여기는 럭키금성의 경영이념의 근간이 됐다고 말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많은 형제와 자녀를 거느린 장손으로서 자연히 형제간의 우애와 깊은 관심을 갖게 됐으며, 인간관계에서도 인화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게 되어 ‘인화’는 그룹의 사시(社是)가 됐다.

연암의 동생 구평회는 “저희 그룹에서는 창업 초기부터 오늘 날까지 인화단결(人和團結)이라는 말이 불문율적인 하나의 사시(社是)로 내려오고 있는 데, 그 근원을 따져보면 이전부터 구교리 집안의 가훈으로서 쓰이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교훈이나 가훈으로서는 다소 보수적인 경향이 풍기기는 하지만 인화라는 경영이념을 명시한 것은 릭키금성에 참여한 인적구성의 복잡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초 사업 파트너 허씨 집안, 연암 구인회의 형제들, 2세들,창업자를 도운 경영자들, 공채로 뽑은 인재들 등등 다양성 때문에 ‘인화단결’을 통해 성장할 수 밖에 없다.

인화(人和)는 화기(和氣)에서 찾을 수 있다. 화기(和氣)란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인 삼기론(三氣論)에 근거를 두는 데 첫째가 패기(覇氣)요, 둘째가 의기(義氣)요, 셋째가 화기(和氣)이다. 화기란 여러 구성원이 서로 믿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아낄 때 이루어지는 분위기이다. 직장에서 화기에 찬 분위기와 단결은 생산성을 향상 시키고, 구성원의 보람을 갖게 하는 기본이 되고 있다.

그가 평소 강조해 온 ‘기업이 인간이고 인간이 기업’이라는 기업관은 ‘나무를 가꾸듯이 연암이 소중히 해 온 사람중심의 기업경영’을 지칭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인화중시는 다음 세대인 상남 구자경의 인재 육성철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고객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LG

“오늘의 LG는, 23만명 구성원들의 열정과 헌신, 수많은 파트너사들의 신뢰와 협력, 그리고 무엇보다 LG를 응원해주신 고객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LG의 진심이 담긴 우리만의 방식을 더욱 고민해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겠습니다. 제대로 실천해간다면 ‘고객과 사회로부터 진정 사랑받는 LG’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취임 1주년을 맞고 한말이다. 고(故) 구본무 회장의 급작스런 별세로 당시 40세의 구 회장이 국내 4대 대기업 중 한 곳인 LG의 총수가 되자, 재계에선 리더십 공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구광모 체제에 대한 그룹 안팎의 점수는 후하다. 40대 젊은 총수답게 ‘실용과 미래’를 내세우면서 LG의 혁신과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평가다.

공정위는 LG그룹의 총수를 고(故) 구본무 회장에서 4세대인 구광모 회장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창업주 고(故) 구인회 전 회장과 구자경 명예회장, 고(故) 구본무 회장에 이어 4세대가 그룹 전면에 나서게 됐다. 구광모 회장은 고(故)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이지만, 2004년 고(故) 구본무 회장의 양자로 입적하며 LG가의 후계자로 낙점된 바 있다. 이는 구씨 집안의 유교 문화의 전통에 의해 장자승계 원칙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다.

73세 나이로 타계한 고(故) 구본무 회장은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손자이자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4남2녀 중 장남이다. 그는 1975년 LG화학에 입사해 20년만인 1995년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고 회장직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매출 30조원에 불과했던 LG그룹은 고(故) 구본무 회장 재임 시기에 전자·화학·통신 등 3대 사업을 주축으로 매출액 160조원에 자산 129조원대의 재계 4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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