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8)
[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8)
  • 임명진
  • 승인 2019.07.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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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9일간의 혈전, 일본의 호남 점령 야욕 무산시켜
비록 참혹한 패전으로 끝난 2차 전투이지만 그들이 남긴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이후 행보는 어떠했을까.

◇호남 공격 시도 타진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다. 장장 열흘간의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진주성벽을 허물고 아예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진주성이 성으로서 기능을 다시는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얼마나 진주성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한 뒤 전라도 진출을 타진했다. 인근 하동과 사천 등 서부경남 일대를 초토화 하면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차례로 점령했다.

지금의 남원 방면인 단성과 산음(현 산청 지역)으로 진격해 올라갔고, 구례와 광양, 순천 등지로도 공격을 개시했다.

그 여파로 남원에서부터 곡성을 지나 순천까지는 인가가 텅 비다시피 했다. 그동안 안전지대였던 호남도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라도 남원에서 조명 연합군과 몇 차례 전투를 벌인 뒤 돌연 진주로 다시 철수했다. 그러다 다시 그들의 본거지가 있는 부산 방면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7월17일이다. 진주성 전투가 끝나고 불과 보름만의 일이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

일본군이 갑작스럽게 철군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일본군이 진주성 전투에서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일본군의 피해 현황을 자세히 수록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본군도 진주성의 9일간의 결사항전에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2차 전투 결과 비록 진주성이 함락은 당했지만 이때 일본군도 많은 병력을 상실해 전력이 약화됐다”면서 “일본군도 호남으로 들어가 조선군과 몇 차례 교전을 시도했지만 전투력이 많이 소실됐기 때문에 더이상은 버텨내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명군이 곧바로 출병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진주성 구원에는 수수방관하던 명군은 막상 일본군이 호남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급히 군대를 출병시켰다.

명의 낙상지, 송대빈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례 등지에 진을 쳤고, 뒤이어 명의 부총병 사대수도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선봉으로 남원에 당도했다.

대구에 주둔 중인 명의 장수 유정도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출병하다 적이 물러가자 되돌아갔다.

확실히 명의 대처는 진주성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명군은 진주성의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진주성 함락에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본군이 당초 진주성만 목적이었다면 호남으로 진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한 뒤 구례와 곡성, 순천, 남원 등지로 진출했고,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다시 후퇴했다.

일본군의 철수가 진주성에서 입은 피해로 호남 점령은 사실상 불가하다는 현실적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나타나듯 일본군은 진주성 뿐만 아니라 전라도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잠시 성을 비워달라는 제안은 기만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일본군이 호남 진출을 시도하다가 중도에 철수한 배경으로는 진주성이 9일 동안 결사항전 하면서 일본군의 기력을 소진시킨 덕분이란 평가가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군의 실제 피해는 어떠했을까. 선조실록에는 경상좌도 감사 한효순이 왜적에게 들은 진주성 전투 소식을 보고한 기록이 있다.

‘우도에서 돌아오는 왜적 40여 명이 모두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였는데, 저들이 말하기를 진주의 접전 때 일본인은 반이 죽었고 조선인도 많이 죽었다. 중상을 입은 왜인은 더러는 메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본군의 피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전해들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군도 9일간의 전투를 치르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추론은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진주성, 호남을 지켰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후 몇 차례의 전투에서 더 이상 전라도 공략이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진주성 함락이라는 전술적 목표는 달성했지만 조선의 곡창지대이자 이순신 장군의 수군 근거지인 호남 점령이라는 당초의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한 것이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결과적으로 진주성은 패전으로 끝났지만 일본군도 전력 손실이 커 잠시 주변 지역을 약탈하다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를 계기로 강화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까지 일본군의 제1차 조선 침략전쟁도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두 차례의 진주성 전투 이후 7년간의 전쟁에서 다시는 호남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만약 일본이 호남을 장악하고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진주성 2차 전투는 단순히 패전으로 기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진왜란은 호남이 있어 승리했다. 그 호남을 지킨 것은 바로 진주성이었다.

두 차례나 진주성을 지킨 의병과 조선군, 의기 논개로 대변되는 이름 모를 민초들. 그들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군사적으로 보면 성이 함락되고 수만의 사람이 전사한 참혹한 전투라고 볼 수 있지만 일본군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 결국 일본이 호남 진출 야욕을 꺾어버리고 조선의 최후의 보루인 호남을 방어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한 전투”라며 “진주성 2차 전투는 전투에서는 패전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한 세기의 전투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정의 내렸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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