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6] 연암 구인회의 기업가정신(2)
일취월장 진주경제[6] 연암 구인회의 기업가정신(2)
  • 정희성
  • 승인 2019.07.1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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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책임 다하는 기업이 성공할 수 있다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6]연암 구인회의 기업가 정신-2

“한번 도취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교만해지고 발전이 중단된다. 쉬지 않고 현장에서 뛰면서 새로운 것, 더 발전시킨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전력투구하는 사람만이 선두를 달릴 수 있다. 너는 내 대신 공장에서 뛰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업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복리를 먼저 생각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에 보탬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기업을 일으킴과 동시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기업만이 영속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다.”(구인회 회장의 전경련 기고 중 일부)

 
구인회 회장
◇스스로 연구하고 끝까지 개발

“안 깨지는 뚜껑 좀 누가 한 번 연구해볼 수 없나? 이거 속상해서 해먹을 수 있느냐 말이다!”

연암은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다. 그리고 이는 주력사업이 화장품제조에서 플라스틱사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화장품 통 뚜껑이 절반 이상 깨지고 크림이 쏟아져 흘러서 팔수가 없다는 도매상의 항의가 이어지자 품질관리에서만은 그 누구보다 철저했던 연암이었기에 더 속이 상했다. “크림 100통 가운데 불량품 한 통이 섞여 있다면 다른 99통도 모두 불량품이나 마찬가지다. 아무거나 많이 팔면 장땡이 아니라 한 통을 팔더라도 좋은 물건 팔아서 신용 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모르냐”는 구 회장의 말에 잘 깨지지 않는 크림통 뚜껑은 지상과제가 됐다.

속이 상해 내뱉었던 연암의 이 한 마디는 훗날 락희화학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 연암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견고한 크림통을 보게 되었다. 그 물질이 플라스틱이라 불리는 합성수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동생 구태회 전무를 불러 다른 일은 다 그만두고 플라스틱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연암 본인 스스로도 당시 일본으로부터 플라스틱에 관계된 책 6권을 입수해 탐독하고는 플라스틱 산업의 유망함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합성수지에 대한 연구는 락희화학의 주력사업을 화장품제조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1955년에는 락희화학 연지동 공장이 신축되면서 ‘럭키’ 상표를 부착한 치약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럭키치약은 완벽한 제조공법을 공여 받아 제조한 것이 아니었다. 토막정보를 모으고 기술을 하나둘씩 깨쳐가면서 오직 하면된다는 의지 하나로 순수 국산 치약의 개발에 성공한 것이었다.

당시의 치약시장은 미제 콜게이트가 휩쓸고 있었고 국산은 종이봉지에 담긴 가루치약이나 조악한 튜브치약이 전부였다. 플라스틱 빗에 이어 칫솔을 만들어내면서 치약 개발에 대한 준비를 남몰래 해오던 차였지만, 콜게이트에 견줄 만한 치약을 개발하겠다는 일념만 있을 뿐, 어디서 어떻게 기술을 익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연암은 태회와 평회, 두 아우에게 외국 참고서적과 자료들을 최대한 입수하게 하여 공부를 시키는 한편 콜게이트 치약의 성분분석과 제조과정 습득에 전념했다. 밤을 지새우는 연구개발이 수개월간 지속됐으나 습도제와 배합비율, 기포제 첨가, 향료, 색상 등 기술적 난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외국기업과 기술이전을 체결하고 있는 구인회 회장.


쉽게 생각했던 튜브 제조 문제는 연암이 조선알마이트 공장운영 시절 눈여겨보았던 도금기술과 기술자들로부터 얻은 단편 조언으로 냉간압착이라는 튜브 코팅기술을 개발하고 나서야 풀렸다. 하지만 치약 품질 개선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첩첩산중이던 국산치약 개발 문제로 고민하던 때, 마침 아우 구평회가 국제청년상공인회의 참가 차 멕시코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연암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명을 받은 구평회는 멕시코 일이 끝나고 곧장 뉴욕으로 날아가 수소문 끝에 콜게이트 회사를 찾아 자료 입수를 타진했다.

회사 기밀이라며 한마디로 거절당했지만, 구평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몇날 며칠을 콜게이트 외곽의 연구소와 납품업자들을 찾아다니며 치약제조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수집해 정리했다.

미국에서 보내온 자료로 사기가 충천한 락희화학 연구진은 곧바로 시험제작에 들어갔다. 배합비율 등을 수없이 바꾸고 조정하며 거의 일 년 가까이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져 나온 치약은 콜게이트와 거의 똑같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연암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버터 먹는 사람과 김치 먹는 사람의 치약은 달라야 한다. 우리 기호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 보자.” 우리에게 맞는 맛과 향기를 찾기 위해 사이다, 비누, 껌 등 다양한 물질을 분석하고 향료회사와 접촉한 끝에 톡 쏘는 맛과 은은한 맛의 중간에 해당하는 럭키치약 고유의 맛을 만들 수 있었다. 럭키치약이 미제 콜게이트를 몰아내고 시장의 선두를 달리며 국민치약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이처럼 눈물겨운 연구개발의 노력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공생(共生)을 넘어서 상생(相生)

연암 구인회 회장의 기업에 대한 생각을 상생(相生)철학에서 엿 볼수 있다. 상생이란 말 그대로 서로 살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즉 상생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을 덕으로 삼아, 서로 잘 되게 하는 것이다.

상생은 ‘현상 유지적 협조관계’ 인 소극적 의미의 ‘공생’ 보다 한 차원 높은 개념이다. 이를 통해 생태계는 종족유지를 넘어 진화와 발전의 모티브를 얻는다. 상생시대를 경쟁시대와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은 ‘시너지효과의 일반화’에 있다. 미래학자들은 상생의 원리가 21세기 인류를 이끌 지침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상생은 생태학에서 파생된 개념인 공존(co-existence)이나 공생(symbiosis)보다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연암은 일찍이 이러한 상생철학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켰다. 연암은 6세가 되던 해부터 조부 만회공(晩悔公)의 엄격함 속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5세부터는 부친 재서공(再書公)의 허락을 받아 초립을 벗고 머리를 깎은 후 지수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학했다.

그후 18세 되던 해에 연암은 신학문의 필요성을 보다 절감하고 처가의 지원을 받아 서울로 상경해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학문과 문화의 홍수속에서 안목을 높이고 많은 지식을 쌓으며 생활하던 중 장인의 타계 등 집안문제로 서울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연암은 새로운 인생설계를 펼치기 위해 사고와 모색을 날을 보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는 일제에 강제 합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무사안일하게 살려는 허무주의가 풍조가 퍼지고 있었지만, 연암은 장차 실업가로서 자신과 민족을 향해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일에 청운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연암의 상생철학은 이러한 개인적,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게 된 이념 중의 하나였다.



 
연암의 기업가정신과 LG기업문화. 출처 연암연구-한국경영사학회연구총서.


연암은 앞서 보통학교 3학년(1922)이 되던 해에 마을청년들과 연대해 장근회(將動會)를 결성하고 농촌 새마을운동과 같은 의식의 전환과 근면 활동을 주도해 생활의 세 기풍을 일으키는데 앞장선 바 있었다. 귀향한 청년 연암은 승산마을을 구석구석 살펴보다가 바로 장근회의 성과를 인식하게 되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게 일하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연암은 근로의 결과가 식산(殖産)과도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연암은 마을 어귀에 있는 일본인 무라카미(村上)의 잡화가계를 관찰하면서 또 학교에서 배운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상기하고 마을 친구들과 함께 공동구판장 운영을 시작했다. 마을에서 필요한 석유는 물론 각종 생활필수품을 대처에 나가 공동구입해 적당한 이윤을 얹어 싸게 팔면 주민에게도 득이 될 뿐 아니라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협동조합의 기금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협동조합이 설립됐고 연암은 조합전무를 거쳐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조합임원과 함께 마산, 진주 등 도시로 다니면서 다양한 일용잡화를 구입해 구판장에 진열했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무라카미가 조성해 온 상업기반을 밑둥이째 흔들어 놓고 말았다.

일찍이 농촌에 없었던 협동조합이란 근대화된 유통점이 연암을 비롯한 몇몇 젊은이의 착상과 노력으로 온 마을에 알려지면서, 이왕이면 값싸고 물건도 많은 조선 사람의 물건을 팔아주자는 여론이 이웃 마을까지 확산되어 갔다.

그는 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포목의 유통경로와 마케팅 기법에 대한 식견을 넓혀 나갔다. 그 무렵 경성(京城)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는데 그는 신문도 열심히 읽고 라디오 방송도 청취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고 나라 안팎의 정세 파악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협동조합의 운영경험이 쌓이면서 주민들의 생필품인 광목과 비단도 취급하게 됐고, 이즈음 연암은 민족지로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아일보 지국을 설치하고 지국장이 되어 언론과도 첫 인연을 맺었다.

연암은 이러한 협동조합의 운영경험을 바탕으로 상생에 대한 그의 철학을 키워나갔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는 ‘주고 받음의 관계‘ 이다. 사업을 하면서 다른 기업과 손을 잡는 이유는 어떠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상대편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나 혼자의 이익만을 생각해서는 원만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조직운영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Win- Win사상’을 바탕으로 연암은 나 혼자만의 이익보다는 조직 전체가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기업을 경영해 왔다.

럭키치약 하나만 보더라도 원가절감을 이유로 원료를 질이 낮은 것으로 바꾸어 사용한 일이 없었다. 럭키 제품을 선택해주는 소비자에게 언제나 더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꿈을 가진 기업인의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 연암은 평소에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한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개발하여 기반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목표 외에 보다 상위개념인 국민생활에 봉사한다는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 이웃, 그리고 국민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상생철학을 나타나고 있다.



◇민족주의 경영철학 “민족사회의 번영에 이바지해야”

먼 훗날 기업가로서 대성한 연암이 언제나 민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민족사회의 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에 목격하고 체험한 교훈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암의 민족정신에 대한 자각은 그 후 위험을 무릅쓴 직접적인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연암이 보통학교 3학년이 되던 해(1922), 일본인 교장이 한국학생에 대해 편파적으로 징계를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연암은 이러한 편파적 징계를 민족차별로 항거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한 동맹휴학을 주동했다. 교사의 회유와 학부모의 설득이 뒤따랐지만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일본인 교장을 전출시킨 결과를 얻어냈다. 이러한 동맹휴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그 사건의 리더로 활약했던 연암과 그 밖의 대표 10여 명은 그 해의 성적표에서 ‘품행’이 갑(甲)에서 병(丙)으로 떨어지는 쓴 맛을 보아야 했다.

또 한 번은 연암이 구인회상회를 경영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다름 아닌 이웃고을인 설뫼의 선배인 백산 안희제(安熙濟)였다. 의령 설뫼골이 낳은 고명한 유림가인 안교리(安校理)의 집안으로 양정고보와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항일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선 그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처와 독립운동의 비밀자금 루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미년에는 기미육영회를 조직해 전도있는 젊은이를 유학시켜 인재로 키우는 일과 만주에서는 농장을 운영해 수백호의 조선 농민에게 일터를 제공한 그가 일제의 수배망을 뚫고 연암을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백산선생이 연암을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기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연암은 어려서부터 스무살 위인 백산을 집안간의 교류를 통해 알고 있었고, 그의 인품을 눈여겨보아 왔으므로, 비로소 심중의 뜻을 밝힐 수 있었다. 비록 함께 고초를 겪지는 못할망정 힘이 닿는 한 자금으로나마 동참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후 연암은 1만원을 만들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했다.

인물이 인물을 안다고도 했지만 일찍이 설뫼의 안교리와 승산의 구교리 집안간의 상호 신뢰와 존경이 없었다면 이같은 청탁이나 참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연암의 남다른 조국사랑과 민족정신은 일제의 패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폐한 국민경제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 국민생활 향상에 필수적인 제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연암이 스물다섯의 나이로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을 설립해 상업활동을 시작한지 15년, 그는 불혹의 연륜을 쌓은 후 스스로 생산의 주체가 된 제조업자로 변신했다. 패기왕성한 청년기의 사업의지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을 관통하면서 궁극적으로 닿게 된 도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했다.



◇연암의 기업가정신 경영어록

이와 같은 연암의 도전과 개척정신, 상생철학과 인화단결, 신뢰 그리고 연구개발을 중시하는 기업가정신은 그의 경영어록 곳곳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싸게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제품이 성공하자면 좋게 만들어야 한다. 좋은 상품은 잘 팔리는 법, 우리 제품이 잘 팔리는 때가 오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결코 값을 흐리지 말 것이며 일시적으로 팔아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 고객과 꾸준한 관계만이 기업의 생명이다.”

“기업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활동이다. 기업을 하는 데에는 내부의 인화가 무엇보다 서야 한다. 인화로 단결하면 무엇인들 불가능하겠는가. 만사가 모두 잘되더라도, 인화가 깨지면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도리이다.”

연암이 화장품 제조업을 본격화 할때 이미 오랜 상업활동의 경험을 통해 사업가로서의 정신이 형성돼 있었고, 이같은 모습은 일상을 통해 드러났다. 이를테면 연암의 경영철학은 거창한 학문적 뒷받침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통찰력과 남다른 판단력, 그리고 민족의식과 같은 시대적 소명의식이 어우러져 우러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장품 생산을 발판으로 해서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틱 공업에 진출하려고 할 때, 연암이 형제와 동료들을 설득하면서 한 말은 이러한 연암의 뜻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나는 결심했다. 이런 사업이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의 생활필수품은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생산업자가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게 만들어 내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고 전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리고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손대지 못하는 사업을 착수해서 성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생각해 봐라. 그래서 나는 이 플라스틱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학교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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