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수필가)
이육사가 살던 고장 청포도가 익어 가면 내 살던 고향에는 옥수수가 여문다. 옥수수 꺾어다가 모깃불에 구워내어 전설을 불러오는 할머니의 대 평상에 올라앉아 이손저손 옮겨가며 하모니카를 분다. 북두칠성이 초가지붕의 용마루위에 걸터앉을 때면 휙! 하고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의 긴 꼬리 끝을 붙잡고 소원도 빌어본다.
초벌메기 벼논에서 허리 굽힌 고단함에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마루청을 들썩이고 횃불 들고 천렵 갔던 삼촌들이 돌아오면 어머니의 풋고추 다지는 도맛소리는 부엌에서 요란하다. 짚방석 내다 깔아 이웃사촌 불러 모아 양푼에 한 가득이 막걸리 걸러놓고 도란도란 이마를 맞대면 모기 물까 염려되어 할머니의 부채는 허공에서 춤을 춘다.
이제는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고향의 칠월이고 식어버린 가슴을 다시 데워야 들을 수 있는 전설이 되었다. 세월의 강 건너편에는 우리들의 아련한 초상이 아직도 가슴 따뜻한 온기로 남아서 돌아보고 섰다. 현관문 찰가닥! 하고 닫아버리는 단절의 쇳소리가 매정스럽고 아래 위층의 사람들은 서로가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딴 세상의 사람으로 바꿔놓은 그 세월이 야속하여 애가타서 못 떠나고 머뭇대며 서성인다.
옛정 그리워 목말라하는 까닭조차 부질없는 환상이 되고 예리한 문명 앞에서 질박한 웃음은 냉소의 외면으로 따돌림을 당하며 그 따사롭던 가슴이 속절없이 식어가도 풍요의 환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오늘이 서글프다.
닫혀버린 문 밖에는 내 이웃의 아이들이 뛰놀고 젊은이들이 내달린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젊은이들은 모두의 희망이며 노인들은 우리들의 보물창고이다. 그들이 있어 내가 이웃이 된다.
육사는 짓밟힌 영육까지도 함께 아우르며 광복이 찾아 올 길을 트며 문을 열었다.
우리의 것이기에 함께 누리고 싶어서다. 이제 우리는 흰 돛단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가난의 늪에서도 빠져나왔다.
우리도 식탁위에 청포도 따다가 쟁반 가득 담아놓고 하얀 모시수건도 마련하여 고달픈 몸으로 찾아 온 손님과 마주앉아 옛 이야기 알알이 꿰며 두 손을 흠뻑 적실만 하다. 그리하여 서로가 마주본 닫쳐진 문을 열고 주저리주저리 전설을 엮어 가면 좋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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