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9] 구자경의 기업가 정신(3)
일취월장 진주경제[9] 구자경의 기업가 정신(3)
  • 정희성 기자
  • 승인 2019.07.30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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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장에 재임한 25년 동안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경영지표로 내세운 분야도 기술이었다. ‘연구개발의 해’, ‘기술도약의 해’, ‘연구개발체제 강화’, ‘선진수준 기술개발’ 등 표현은 달랐어도 지향 점은 하나였다. 기술을 중심으로 국제화 시대에 대응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많게는 그룹 총 매출액의 7.5%까지 연구개발비로 투자했을 만큼 기술개발은 나의 희망이요, 믿음이었다. 
60년대 우리가 화학과 전자라는 두 축으로 성장하면서 잘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갈등도 있고 경쟁심리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선친의 탁월한 조정과 지도력으로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라디오 공수사건’이었다.  

1968년에 금성사가 중남미로 수출시장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심각한 사고가 터졌다. 무려 1000대의 라디오에 대한 거액의 클레임이 발생한 것이었다. 
금성사는 내가 책임지고 있는 럭키공장에서 만든 케이스로 라디오 완제품을 만들었는데, 공교롭게도 중남미에 수출한 1000대의 라디오 케이스가 모두 망가지고 만 것이었다. 바이어 측의 주장은 금성사가 포장한 그대로 화물을 하역한 후 내용물을 꺼내보았더니 케이스가 하나같이 다 파손돼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식으로 보상을 요구해온 것이었다. 
당시 케이스를 제작한 락희화학의 책임자는 나였고, 제품을 수출한 금성사의 책임자는 박승찬(朴勝燦) 전무였다.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선친은 대책회의를 소집했고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라디오가 쇳덩이도 아닌데 마구 다루면 깨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쨌든 제품을 포장한 쪽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이어 쪽의 실수일 거라는 분위기에서 내부로 책임론이 돌려지면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박승찬 전무였다.
“결론적으로 깨져 문제가 된 것이 플라스틱인 만큼 럭키 측 잘못이 있는 게 아닙니까? 금성사로서는 내부 회로 등 기능부분 이외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몇 개가 깨졌다면 불량품이 끼어들었다고 하겠지만 전량 파손된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는 규격에 맞춰 제품을 생산 납품했는데 이제 와서 케이스를 탓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완제품 포장은 금성사가 했으니 포장 책임이 큰 것 아닙니까”
파손의 원인이 케이스 때문이냐, 포장 때문이냐. 한 치의 양보 없이 두 회사의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논쟁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언성까지 높아졌다. 
“그럼 내가 때려 치면 될 거 아니요!” 급기야 감정을 이기지 못한 박 전무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뜻밖의 일을 지켜보는 회의장의 시선은 당황함이 역력했다. 더구나 선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나로서는 더욱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그날 나는 선친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이것이 기업에 투신해 선친에게 들은 가장 큰 타이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봐라. 니가 싸워서 될 일이가? 양보할 건 하고 이해할 건 해야되지 않나 말이다. 논쟁을 하더라도 덕성 있는 경영자는 항상 인화(人和)를 생각해야 하는 기다. 그래 갖고 앞으로 그룹 전체를 어떻게 이끌고 갈 수 있겠나”
선친의 꾸지람은 한참 동안 계속됐다. 요지는 앞으로 그룹 전체를 이끌어 가야할 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과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날만큼 선친께서 경영자의 고뇌와 자세에 대해 소상하게 말씀하신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내가 부족함이 많았고 선친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때문이었다. 사내 분위기는 이번 수출 클레임과 관련해 문책이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긴장했던 직원들은 생각지도 못한 승진 인사에 탄복하고 말았다. 선친께서는 나와 박 전무를 똑같이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보직만 서로 바꾸어 맡도록 하셨다. 모두들 절묘한 인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승진을 시킨 것은 의기소침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이었고, 보직을 서로 바꾼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니 참으로 깊은 사려와 따뜻한 배려였던 셈이다. 
그 후 문제의 클레임은 우리 측 잘못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얼마 후 박 전무는 사태 수습을 위해 현지로 급파됐고 그 과정에서 어이없는 내막이 밝혀진 것이다. 
수출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바이어가 현지 반입과정에서 관세를 물지 않기 위해 밀반입 하다가 문제가 발생했던 거였다. 돈을 아끼려고 제품 박스를 헬기로 공중에서 산림 속에 떨어뜨렸던 것이었다. 특수 포장을 하지 않는 한, 하늘에서 던지는데 망가지지 않을 플라스틱 제품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그 사건으로 나는 선친의 자식 사랑과 경영철학을 확인했고 배웠으니 결과적으로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던 셈이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내게 더욱 영향을 끼친 분은 옥태선 선생님이었다. 진주농업학교를 나온 선생님은 내가 4학년이 되던 해에 부임했다. 
당시 일제는 ‘농산어촌진흥계획’이라는 것을 발표해 각 분야의 생산성 향상을 장려했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각급 단위 학교마다 농업학교 출신 교사를 한 분씩 배치해 농법 개량 등을 지도하게 했다. 옥 선생님도 이러한 배경으로 부임했는데, 우리보다 나이가 7~8세 정도가 위인 젊은 교사였다. 키가 컸고 마른 편이었으며,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항상 밖에서 생활해서 살색은 검었다. 
나는 그 분의 영향으로 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훗날 교사의 길을 선택한 배경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아가 지금의 연암축산원예대학으로까지 교육의 인연을 확대하게 하는 출발점이 됐다.
선생님이 부임하며 생긴 가장 큰 변화는 학교 조경이었다. 선생님은 이곳저곳에 나무도 많이 심고 운동장도 넓혔으며, 실험실도 만들었다. 또한 운동장 한쪽에 채소 온상과 묘묙장, 퇴비장을 만들어 과학적인 농작물 재배법을 가르쳤다. 그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내용들이었다. 
봄에 일찍 나무를 심을 때는 온상 열로 묘묙을 만들어 사용토록 했으며 밭에 심는 채소 모종도 마찬가지였다. 300평이 넘는 학교 실습지에는 호박과 오이, 토마토, 가지, 고추와 배추 등이 재배됐는데, 먼저 묘묙장에서 싹을 틔운 후에 옮겨 심도록 했다. 밭에 심을 때도 작물의 크기와 조건에 맞춰 줄로 맞춰 심고 가꾸도록 지도했다. 벼를 심을 때 줄모라고 하여 눈금을 보아가며 심는 것도 옥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이렇듯 채소 하나를 길러도 새로운 방법이었고 과학적 지식이 밑바탕이 깔려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퇴비 만들기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퇴비를 모은 것이 아니라, 학년 별로 등수를 매겨 학생들 사이에서 선의의 경쟁을 유도했다. 그러니 모두들 1등을 하려고 학교에 갈 때도 퇴비를 싸 가지고 갈 정도였다. 그렇지만 역시 6학년들이 가장 많은 표창을 받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분에게 두 가지 인상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절대로 연작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재와 분뇨를 섞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늘 집 근처 텃밭의 정해진 곳에 오이나 가지, 상추, 토마토 등을 재배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수업 시간에 절대 연작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연작을 하면 땅이 퇴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할머니께 말씀 드렸고 다음 해에는 작물을 바꾸어 심으셨다. 역시 수확량의 급증이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또 한 가지는 중화 작용에 관한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집안 연료가 대부분 나뭇가지나 장작이었다. 타고 난 재는 헛간에 모아 두었다가 다음에 거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종종 재 속의 아주 작은 불씨가 원인이 되어 다시 불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래서 받아 둔 오줌을 뿌리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은 이것도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알칼리 성질인 재에 산성인 오줌을 뿌리면 중화가 되어 퇴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다음부터는 물을 뿌리게 되었다. 이러한 인상적인 가르침으로 나는 일찍부터 과학 영농에 눈을 뜨고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 탓으로 훗날 진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희망’에 관해 쓰라는 작문 시험에서 나는 주저 없이 교사로서의 나의 미래를 밝혔다. 그 후 진주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사의 길을 가게 된 것도 옥태선 선생님을 통해 받은 강렬했던 인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학교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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