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도가 죄인가?
경사도가 죄인가?
  • 경남일보
  • 승인 2019.07.3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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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진(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최만진 교수
최만진 교수

그라츠는 오스트리아에서 비엔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 진주와 여러 가지로 닮은 것이 많다. 우선 천 년에 근접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6개의 대학과 4만 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있는 대학도시이며, 음악과 박물관 그리고 건축으로 유명한 문화도시이기도 하다. 지형적으로도 매우 흡사해서 도시 가운데를 질러가는 무르강이 있고, 그 바로 위에는 진주성과 비슷한 그라츠 산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과거 군사적 방어 도시라는 것과, 인구규모가 유사하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도시의 전통 경관을 잘 보존했다는 차이점도 있다. 그라츠의 구시가지는 중부 유럽에서 중세 원형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비해 진주는 천년 역사도시의 자취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진주성이 훼파되었고, 성 밖의 대사지 연못이 메워졌으며 객사 등의 주요 건물들도 철거되었다. 해방 후 한국 전쟁 때에는 도시가 대부분 파괴되었고, 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바둑판 형태의 도시 공간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성안의 도시 공간도 정비 사업 차원에서 잔디 공원으로 바꾸어 버렸다. 진주성과 촉석루가 복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그 역사적 가치가 반감되어 있다.

하지만 도시를 언제까지나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는 박물관으로서만 조성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라츠는 도시 활력을 고양하기 위하여 초현대적 건축물도 유치하기 시작했다. 아메바 형태를 한 ‘현대미술관’이나 강 위에 떠있는 인공 ‘무르섬’이 그 대표적인 경우로 수많은 건축 순례자들의 세계적 성지가 되고 있다. 한편 그라츠에는 일반 관광객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은 매우 주목 받는 건축 스타일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코발스키 교수가 설계한 ‘언덕 위의 주택’이다. 마치 메뚜기나 여치 같은 곤충의 형태를 가진 이 집은 주변의 자연 환경, 특히 그라츠의 경사지형과 완벽한 합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독창적인 건축 언어는 그가 설계한 교회, 대학 건물, 공동주택 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어 지역 풍광을 대변해 주고 있다.

최근 진주에서는 의회를 중심으로 경사도 조례 완화에 대한 뜨거운 논의가 일고 있다. 찬성하는 쪽은 시민의 제대로 된 재산권 행사와 개발을 통한 지역 경기 활성화라는 장점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인근 지자체에 비해 규제 정도가 지나쳐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진주시를 비롯한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은 난개발로 인한 고유의 자연 경관 손상 및 파괴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찬반이 이처럼 팽팽히 맞서다 보니 경사도 규제 기준의 적정성에 대한 용역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라츠가 주는 시사점과 교훈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과거의 고유한 건축 및 도시 유산을 성공적으로 보존하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초현대적인 도시건축을 실행함으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코발스키 건축에서처럼 지역의 인문지리적인 특징을 반영한 고유의 독창적인 건축 및 도시 경관을 창달해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경사도의 규제 기준이 12도나 20도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즉, 규제 설정의 궁극적 목적을 지역 특징을 나타내는 경관과 풍광을 살리고 잘 가꾸어 가는 것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대안이 없는 경사도 완화 논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반대로 건축이나 건설기술이 매우 발달한 오늘날에 물리적인 경사도만을 기준으로 해서 마냥 규제를 가하는 것도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최고의 방법은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방안과 정책을 연구해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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