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4]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4]
  • 박성민
  • 승인 2019.08.0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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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서(2)
드렌테 빈센트 반 고흐 하우스



 
 
◇연습이 완벽을 만든다

고흐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헤이그에 있던 Goupil&Cie 화방에 취직했다.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고흐 자신의 선택이었다기 보다 학업에 별 흥미가 없었던 아들이 집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부모님의 강요였을지도 모른다. 고흐가 일하게 된 화방은 그의 삼촌이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파리, 브뤼셀, 런던, 뉴욕에도 지점을 가지고 있던 꽤 국제적 규모의 화방이었다. 19세기 초 사진기술이 등장하면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똑같이 찍어 내는 일이 가능해졌고, 값비싼 실제 작품 보다 저렴한 복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다 보니 화방은 소비자의 요구를 빠르게 파악하여 수많은 고객층을 확보 할 수 있었다.

고흐는 이후 파리, 런던 지점에서도 일하게 되었고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네덜란드 시골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 적응하며 넓은 세상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의 그림과의 첫 만남이 독자적인 작품 활동이 아닌 화방 직원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독특하긴 하지만, 나중에 고흐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치며 그 만의 기법과 분위기를 형성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반은 화방에서 여러 작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가며 만들어진 안목 덕분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방을 찾는 손님들에게 친절한 직원으로써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를 유지하기에는 고흐의 성격과 거리가 멀었던 모양인지 1876년 화방에서 해고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 보조교사 일을 하다가 별안간 신학공부에 매력을 느낀 고흐는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공부는 고흐의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과정이었고, 이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깨달았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도사 양성 학교 입학은 고흐에겐 쉽게 허락 되지 않았다.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고흐는 벨기에에 있던 석탄 광산 지역에 머물면서 광부와 지역주민들을 위해 전도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도전속의 실패는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고흐를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렸고, 그에 대한 포부는 자기희생적 모습으로 변해 고흐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물질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을 잊으며 세상에 등을 돌린 고흐는 가족들과도 완전히 단절한 채 가장 가깝게 지내던 테오에게 마저 소식을 끊어 가족들의 걱정을 샀다, 계속해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고흐는 테오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무언가로 방향을 틀었고 1880년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드디어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로써 살아갈 인생이 앞으로 10년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오직 그림을 위한 인생을 펼쳐 갔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기본 테크닉이 없었던 고흐는 많은 드로잉 연습을 통해 화가로써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연습이 완벽을 만든다’라는 말을 고흐는 굳게 믿었던 것일까. 이 시기의 고흐는 수많은 옛 화가의 작품들을 따라 그리며 드로잉 연습을 했고 구조와 원근법에 관해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고흐는 밀레와 도비니의 작품들을 자주 모사 하며 그림에 대한 기본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익혀 나갔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을 늦게서야 깨달았던 늦깎이 학도였지만, 그 만큼 느껴지는 기쁨과 뿌듯함도 컸을 터. 서른일곱의 짧은 생애 동안 900여점의 페인팅과 1100여점의 드로잉 등을 합치면 2000여점이 넘는 작품을 완성 한 고흐인데, 이 작품들이 겨우 화가의 10년 남짓한 화가인생 동안 만들어진 작품이다 보니 오늘날 고흐를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뛰어 났던 화가들 중 한명으로 보는 것에 아무런 이견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일 것이다.



 
 


◇드렌테 빈센트 반 고흐 하우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던 고흐였건만, 신은 사랑에 까지 고흐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그의 동정심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엔(Sien)이라는 여인은 하필 아이가 둘이나 있던 매춘부 출신이었고, 이는 당연히 가족들이나 주변의 지지를 얻을 리가 없었다.

1883년 고흐가 시엔과 어려운 이별 끝에 머물던 헤이그를 떠나 발길을 돌린 곳은 네덜란드 북쪽의 드렌테 지방이었다. 씁쓸한 이별을 한 직후인데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던 고흐는 주위사람들의 조언으로 상대적으로 생활비가 적게 드는 북쪽지역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고흐가 머물렀던 시간은 겨우 3개월에 불과 했지만 이 지역의 풍경과 분위기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드렌테 지방은 늪지가 많아 토탄이 생산되는 지역이었고 이것은 마을 사람들의 주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마을 여기저기에서 토탄을 캐고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잡초가 무성한 드넓은 황야와 그곳을 지키고 서있는 허름한 오두막은 고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드렌테 지방의 모든 것들은 곧 그의 그림 주제가 되었다. 고흐는 이곳에서 드로잉,수채화 등 여러 작품을 남겼고, 동생 테오에게 드렌테 지방으로 옮겨와서 함께 화가로써의 길을 걷지 않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고흐가 약 2개월간 묵었던 자그마한 방에 들어서면 창문 넘어로 고흐가 이곳에서 보고 그렸던 작품 한 점이 머릿속을 스친다. 드렌테 반 고흐 하우스는 네덜란드에서 유일하게 방문할 수 있는 화가의 머문 흔적이 있는 곳이자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장소다. 고흐가 쓰던 방과 물건들은 고스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모습이 화가가 꼭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이 잠시 자리를 비운 인상을 풍긴다. 어느 날, 고흐는 별안간 부모님이 있던 네덜란드 남쪽 지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그가 머물던 이 집의 주인에게 조차 아무런 언지가 없었던 터라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흐가 지인들과 조우 할 수 없는 외로움에 고통 받았을 것이라는 점과 재정적으로 어려웠을 것, 미술용품을 쉽게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치적으로 고립 된 상황 등으로 추측 해 볼뿐이다. 이후 언젠가 드렌테로 돌아가고 싶다는 언급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내비췄지만,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주소: Van Goghstraat 1 7844 NP Veenoord/Nieuw Amsterdam

운영시간: 화-일 13:00~17:00

홈페이지: https://www.vangogh-drenthe.nl/

입장료: 성인 6유로, 12세 이하 4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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