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11]호암 이병철의 기업가정신(2)
일취월장 진주경제[11]호암 이병철의 기업가정신(2)
  • 정희성
  • 승인 2019.08.0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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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나라 강한 기업을 꿈꾸다
日 유학길에서 당한 식민국의 수모
민족의 현실과 분노 가슴깊이 새겨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호암(湖巖)의 가풍과 성장과정=호암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이찬우(李纘雨)와 권재림(權在林) 사이에 두 누이와 형이 있는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민족과 국가의 수난의 해가 기구하게도 호암 출생의 해였다. 하지만 그의 가정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큰 산맥줄기가 마지막으로 우뚝 솟았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리는 지리산(智異山). 그 지맥인 마두산 기슭에 자리 잡은 중교리는 예부터 숨어사는 고을로 알려져 있었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해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에 뿌리를 내렸다. 12대조 유(宥)가 승정원 좌승지, 6대조 태운(泰運)이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의령에 있는 호암 이병철의 생가.

 
삼성가 가계도. 자료출처 Copyright ⓒ Chosun.com


조부 홍석(洪錫) 대에 천석의 부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하고 영남 유학의 거두 허성재(許性齋)의 문하로 인근에 알려진 유림이며 시문에 능하였다. 부 찬우(纘雨)는 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였다. 호암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부친은 지역의 지주로 만족하지 않고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성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도 참여했으며 한성에서 이승만을 만나 서로 친분을 쌓았다.

“어려운 사람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른 봄 찔레꽃이 필 무렵은 가난한 농촌에서는 가장 어려울때이니, 무심히 넘겨서는 안된다”

모친은 이따금 호암에게 이렇게 타이르곤 했다. 찔레꽃이 필 무렵이란 바로 보릿고개라고 하는 춘궁기를 말한다. 그때만 해도 가난했던 농촌에서는 가을에 거두어들인 양식이 찔레꽃이 필 때쯤엔 흔히 떨어지고만다.

호암은 다섯 살이 되면서 조부가 세운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해 5년 동안 천자문, 통감, 논어 등을 통독할 수 있었지만 그다지 공부는 시원치 못했다.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집안에서 당시 신식학교에 넣기로 결정했다.

호암은 사당 친구들과 작별하고 둘째 누이의 시댁이 있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누이 집에 도착하자 곧 이발소에 가서 아침마다 어머니께서 손수 땋아 주시던 긴 머리를 싹독 잘라버렸다. 호암은 지수보통학교에서의 생활은 모든 새롭고 즐거운 것이었다. 첫 여름방학때 고향에 돌아와 서당 시절의 옛 친구들과 재회하고서야 도회지의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를 절감했다.

불과 몇 달 안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진주에서의 생활을 경험하고 고향에 온 호암은 태어나서 자란 중교리가 너무나 좁고 답답한 곳으로 느껴졌다.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부산으로가서 부관연락선을 탔다. 시모노세키로 가는 선상에서 평생 잊지 못할 불쾌한 사건을 겪었다.

당시 부관연락선은 3000t급의 상당히 큰 것이었으나, 선실 등 내부의 설비는 매우 허술했다. 배는 파도가 거센 현해탄에 접어들어 요동이 심했다. 호암은 뱃멀미가 심해져서 시설이 다소 나은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선실 입구에서 일본인 형사가 거만하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 그러면서 신분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호암은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의 참뜻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사소한 사건일지 몰라도 다감한 청년에게는 굴욕이었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 호암이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지 지배하에 놓인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했던 그 부관연락선에서의 조그마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주 지수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선친은 호암에게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늘 강조한 것은 “거짓과 꾸밈은 개인에게나 국가,사회에도 큰 걱정거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세훈(處世訓)으로 호암에게 자주 풀이해준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매사에 성급하지 말아야 한다. 무리하게 사물을 처리하려 들면 안된다”

호암은 성적도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보통학교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학교 과정을 단기간에 마무리 짓는 속성과가 있는 중학교에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그가 선친에게 했을 때 이 글귀를 처세훈으로서 강조했다.

호암의 선친은 공맹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켰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숭상했다. 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생활윤리 중에서도 특히 신(信)을 강조했다. “비록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신용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호암이 창업이후 지금까지 신용을 기업의 생명으로 삼아온 것도 선친의 그런 유훈이 그 뿌리가 되었다. 삼성이 외자를 도입할 때 삼성 자체의 신용만으로 계약을 할 수 있고, 별도의 지불보증이 필요 없을 만큼 된 것도 선친의 유지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학교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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