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경제[12] 호암 이병철의 기업가정신(3)
일취월장 진주경제[12] 호암 이병철의 기업가정신(3)
  • 정희성
  • 승인 2019.08.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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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사업이다”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한 개인이 제아무리 부유해도 사회 전체가 빈곤하면 그 개인의 행복은 보장 받지 못한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사업이며 따라서 사업에 사회성이 있고 사업을 추진하는 기업 또한 사회적 존재다.

 
호암 이병철 회장. 자료출처=비지니스 워치
◇호암의 사업관= “사업에 좌우되지 말고, 사업을 좌우하라”

사업을 하면서 숱한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이 같은 선인들의 가르침을 이해하면서 호암의 사업관이 되었고 이것을 견지해 왔다.

“3리(三利)가 있으면, 반드시 3해(三害)가 있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아직 없다”

어릴 때 호암이 조부의 서당에서 배웠던 선인들의 가르침이다. 첫 사업인 정미소와 운수업에 실패 한 후 30세가 채 못 된 청년의 가슴에 사무치게 남겨진 교훈이었다. 호암에게 이 실패는 그 후 사업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

호암은 이후 국내외 정세 변동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호암이 실패에 대해서 독일 비스마르크 시대의 프로이센군의 원수 몰트케가 남긴 다음과 같은 명언을 좋아했다.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 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호암도 한때 낙담은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용기를 내어 전진했다고 하면 쑥스러운 생각도 들지만, 적어도 다른 새 길을 찾아 곧 행동을 일으킨 것만은 사실이다. 역사의 커다란 변혁은 언제나 혼란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나 희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도 거기에 속했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결의=호암이 26세에 사업의 입지를 굳혔던 것을 제1의 각성이라고 한다면, 해방과 함께 결심한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은 제2의 각성인 셈이다. 꼭 10년 후인 36세 때의 일이다. 8.15해방은 일제의 압정 밑에서 기업다운 기업 하나 일으킬 수 없었던 이 나라 경제인들에게, 국가경제의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으며 사업의욕을 환기 시켰다.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기업가로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부강한 나라의 기초가 되는 민족자본의 형성이야말로 당면한 최우선의 과제였다.

사회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결의를 몇 번이고 다졌고, 또 바꾸기도 여러 번 했다. 자문자답했다. 정치도 경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한 물자부족으로 국민생활은 빈궁하기 그지없다. 과연 모든 사업은 이것으로 만족해야 좋은가. 이제부터는 자주독립국가의 경제건설에 응분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 민생의 안정에는 경제질서 확립이 선행되어야 하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의 보장을 위해서는 정치의 안정이 불가결하다. 그 정치적 안정을 확고하게 만드는 기반은 우선 경제의 안정에 있고, 거기에 수반해 민생도 안정된다. 민생과 경제, 정치는 삼위일체의 것이어서 서로 적절하게 보완 결합되어야 ‘국가-사회’의 발전이 비로소 약속되는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는 저마다 능력과 장점이 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봉사이자 책임이 아닐 수 없다. 호암은 그의 국가적 봉사와 책임은 사업의 길에 투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 이후 기업을 일으키고 그것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일관된 호암의 기업관(企業觀)이 되어 왔다.

사업이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욕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제아무리 수익성이 높은 사업일지라도 그것을 발전·확장시켜 나갈 능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시기와 사람, 거기에 자금의 3박자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성공을 기약할 수 없다.

호암이 6.25 공산군의 남침으로 서울에서 삼성물산공사 전재산을 처분하고 대구로 피난 갔을 때 남겨져 있던 조선양조장 직원들이 3억 원이라는 엄청난 자금을 비축해 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라고 용기를 주었다. 호암은 놀라웠다. 전란으로 인심이 자못 황폐해진 때가 아닌가. 이렇게 정직하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감동이 되어 가슴이 메었다.

호암은 기업가가 기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해, 하나하나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갈 때, 더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의 흥분과 긴장, 보람 그리고 가끔 겪는 좌절감은 기업을 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실하게 그것을 알 수 없다고 소회했다.

기업은 항상 새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의한 변신을 통해 부단히 성장 발전해야 한다. 기업의 인재들 또한 끊임없는 교육과 연수를 거쳐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왕성한 기업가정신과 기술개발도 없어서는 안 된다. 시대를 앞지르는 정확한 통찰력과 왕성한 창조적 의욕을 꾸준히 갖고 있는 경영만이 기업을 성장 확대시키고 기업의 생명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삼성이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설탕,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에서 출발해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등의 중공업,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으로, 삼성은 그 업종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면서 요 몇 년 사이에는 반도체, 컴퓨터, 산업용 전자기기, 유전자 공학 등 세계 최첨단의 산업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경제 발전에는 반드시 과정과 단계가 있기 마련이다. 자본의 축적상황, 기술의 수준, 내외시장의 동향 등 여건에 상응해 추진해야 산업은 발전하는 것이다.

◇호암의 사업보국과 박정희의 빈곤추방=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가 발생, 정부가 와해되었다. 쿠데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했다. 그리고 5월 29일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다. 그런데 부정축재 1호가 호암이었다. 일본 도쿄에 있던 호암은 귀국하기에 앞서 국가재건 최고회의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정부 방침 그 자체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들과 변칙적이고 불합리한 세제 하에서도 국가경제 재건에 기여하면서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 운영을 뒷받침해 온 기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의 안정 없이 빈곤을 추방할 수는 없다. 경제인을 처벌하여 경제활동이 위축된다면, 빈곤 추방이라는 소기의 목적에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나를 비롯한 많은 기업인들의 처벌을 모면하기 위한 궤변이 결코 아니다. 나는 전 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 서한은 한국신문에 그대로 보도 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일본 신문에 전재(轉載)됐다.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부의장이 만날 것을 요청했다.

검은 안경의 박 부의장은 부정축재 11명의 처벌에 대해 호암의 의견을 물었다. 호암은 답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도 탈세했다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있다. 하지만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 할 수 있도록 규정된 전시 비상사태하의 세제 그대로다. 아직도 전시재정(戰時財政)을 위해 세수(稅收)의 증대만을 꽤했던 1950년대의 세제(稅制)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법인세, 사업소득세, 물품세 등 그 세법체계 자체에 모순이 있는데, 영업세나 부과제세까지 부가되므로 그것을 전부 합치면 결국 세율이 수익의 120%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모순을 정부도 알고 있었기에 세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던 것으로 안다. 많은 기업이 탈세했다고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다른데 있다. 기업을 존속시키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불합리한 세제는 덮어 두고 그에 희생되었던 기업만 부정축재로 몰아 단죄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처벌에 앞서 세제를 개정하는 것이 일의 순서인 줄 안다”

박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호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 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해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 운영, 국민교육, 도로항만 시설 등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 위축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에 타격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될 것이다”

박 부의장은 호암의 말에 수긍을 했다. 이것을 계기로 호암의 사업보국과 박정희의 빈곤추방이 한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호암 이병철 회장.

4.19 이후 계속된 혼란으로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고물가와 실업문제가 심각했다. 그 위에 농산물의 흉작까지 겹쳐 쌀 파동마저 일어났다. 이렇게 중첩된 경제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경제계의 협력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정부와 경제계 그리고 경제계 내부의 의견조정기관으로 정부는 한국경제인협회의 창립을 추진했다. 지금의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이다. 호암은 1961년 8월 16일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선임 되었다.

경제인협회의 정관은 ‘경제인 및 경제 각 부문 간의 연결을 도모하며 주요 산업의 개발과 국제 경제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건전한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경제인협회는 1962년 그 착수연도로 하는 신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인의 조직체로서 경제계의 대정부 창구역할을 담당했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학교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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