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는 먼저 할아버지에게 사과하라
아베는 먼저 할아버지에게 사과하라
  • 경남일보
  • 승인 2019.08.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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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전점석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서 1942년 고향 영양으로 내려가 칩거한 시인이 있었다.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한 오일도이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계속 끌려가는 청년들을 본 시인 오일도(吳一島)가 쓴 한시 ‘송징용차(送徵用車)’는 내 집 앞에서 징용 가는 모습을 풍경화 처럼 그렸다.

吾家大路邊 나의 집은 한길 가/朝暮車連綿 아침저녁으로 수레가 잇닫는다./送送淚何盡 보내고 또 보내는 눈물 어이 끝나리./歸期問杳然 언제 돌아오나 물으면 대답은 아득할 뿐/村巷無人空 시골 마을 사람 자취 끊겼으니/晝靜聞鷄犬 낮에는 고요하여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오나/皇天豈無意 하늘은 아무런 뜻이 없는데/桑海自深淺 상전벽해만 깊고 얕음을 따지누나

아침, 저녁으로 징용차가 왔다. 한두 번 보내는 게 아니라 보내고, 또 보냈다. 시인은 ‘송송(送送)’이라고 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들을 눈물로 보냈다. 그들이 징용으로 떠난 뒤의 마을은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오고 사람 자취는 끊겨버렸다. 이제 마을은 고요하기만 하다.

며칠 전, 주간지 ‘시사IN’ 2018년 12월 31일자 ‘올해의 인물’에서 사진가 주용성이 찍은 슬픈 사진을 보았다. 대번에 할아버지 한 분의 꽉 다문 입, 잔뜩 찌푸린 이마에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쇳덩이 같은 얼굴이다. 큰 글자 달력만 걸려있는 벽면을 배경으로 1인용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 시선은 빼앗긴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운동복 상의를 입고, 목에는 분홍색 손수건을 둘렀다. 방안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침상에 펼쳐진 이부자리는 쏙 들어가서 자고, 그대로 몸만 빠져 나온 것 같다. 정면을 향하여 앉아 있긴 한데 눈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래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이춘식 할아버지이다. 1940년, 열일곱 살에 가마이시 제철소로 강제징용 끌려갔다. 벌써 78년의 세월이 지나서 95세의 노인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그 당시의 썩은 콩깻묵 냄새, 설사, 벌거벗은 등짝을 후려치던 가죽 채찍, 하늘이 노래지도록 퍼 담아도 줄지 않던 석탄.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시간이다. 지금도 두 손과 발을 모으고 앉으면 공포와 수치심이 되살아나고 함께 굶주렸던 얼굴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시인 오일도가 본 그 청년일지도 모른다. 잡혀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동네 어르신들이 흘리신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허공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 혼자 … 혼자 남아 … 마음이 아프고 서운하다”며 울먹인다. 이제 혼자 남았다. 낯선 객지의 단칸방에서 홀로 남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2018년 5월 1일, 창원시 정우상가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제막식이 끝난 뒤 자녀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노동자상을 붙잡고 “아버지”하고 외치면서 울었다. 비로소 나는 역사적 아픔이 먼 곳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았다.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피해보상책임을 인정하자 자기들의 악질적인 식민 지배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보복카드를 들고 큰 소리 치는 일본 수상 아베는 이 할아버지에게 먼저 사과하라.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이분들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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