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육성증언] 7년의 악몽은 평생을 삼켜버렸다
[위안부 피해자 육성증언] 7년의 악몽은 평생을 삼켜버렸다
  • 정희성
  • 승인 2019.08.1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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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서 끌려간 19살 소녀는 머나먼 타지에서 성노예 생활
전쟁참화 겪고 몇번이나 생사고비 넘기며 겨우 목숨 건져
해방후 기적의 생환…끝나지 않은 고통의 기억에 시달려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이 할머니의 육성 증언

1994년에 김순이 할머니는 강제동원부터 생환까지의 과정을 조카인 정인후(현 진주시의원)씨에게 구술했고 정인후씨는 이를 받아 적어 문서화 한 후 진주시에 제출했다. 김 할머니는 이 문서를 통해 1년 뒤인 1995년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 받았다. 아래 내용은 김 할머니와 동생 김차순씨가 구술한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강제동원 그날의 악몽=1939년 음력 10월 오후 5시 무렵, 하동군 고전면 국도 2호선 도로변에서 동생(김차순)이 가져다주는 볏단을 도로가에 널고 있는데 지나가던 화물차가 서더니, 동네 일본 앞잡이 1명과 낯선 사람 2명이 말 한마디 할 여유도 없이 양쪽에서 강제로 두 팔을 껴안고 화물차 뒷 칸에 싣고 부산으로 나를 데려간 후 큰 배에 강제로 태웠다. 그 때 내 나이 19살이었다. 전국에서 강제로 끌려온 수많은 소녀들이 “엄마”를 부르며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밖이 보이지 않는 선실에 가뒀다. 체조를 시키고 쇼도 보여주며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한참 지나 나오니 부산항이 개미처럼 작아져있어 모두 다시 대성통곡했다. 7~8명씩 조를 짜서 선실에 배치됐다. 방 대표 2명씩 교대로 불려나가 큰 그릇에 밥을 받아오면 먹을 만큼씩 덜어 먹었는데 선실이 너무 낮아 똑바로 앉을 수 없어 머리와 허리를 구부리고 웅크린 채 먹었다. 대만과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기차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정해진 숙소 안에서 있었다. 밖은 일본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 부대에 배치돼 나무로 지은 2층 임시 칸막이에서 강제 성노예 생활이 시작됐다.

◇지옥의 7년=칸막이 안에는 밀가루 포대 같은 누런 종이를 깐 긴 나무 침대와 모포 하나가 있었다. 낮에도 컴컴했고, 밤에도 미군들에게 불빛이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심지를 돋운 아주 작은 불빛만 새어나올 정도였다. 칸막이 밖 입구에는 군인들이 손을 씻는 소독물 세숫대야가 있었고, 군인들은 고무풍선을 사용했다.

낮에는 졸병들, 밤에는 높은 계급 군인들이 왔고, 토·일요일에는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지 나가면 들어오고 나가면 들어왔다. 아프면 부대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었다. 끼니 때가 되면 종을 쳐서 알렸고 밥을 먹으면 일본군 감시하에 다시 어두운 나무 칸막이로 각자 돌아갔다. 일본군인들이 항상 가르치길 미군이 폭격을 하면 두 귀를 막으라해서 언제 폭격 당할지 몰라 밥먹다가도 싸이렌이 울리면 미리 파 놓은 굴속으로 숨기 바빴고, 어느 때는 숟가락, 밥그릇을 든 채로 굴 안에 숨어 귀를 막곤 했다.

부대이동에 따라 기차를 타고 버마(미얀마) 랑군(양곤)으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계속하면서 일본군인들의 피 묻은 붕대도 씻었다. 일본군인만 있고 한국군인은 한명도 없었으며, 성노예자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하루는 일본군 졸병이 나를 보고 “조센징”이라고 하도 놀려서 소독 세숫대야를 2층에서 1층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헌병대에 끌려가 돼지우리 같은 곳에 갇혔다. 하루 종일 굶기면서 시말서 쓰고 나왔다. 다시 필리핀 어느 섬으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는데 섬이고 ‘독안 든 쥐 신세’라 생가해 도망칠 생각도 못했다.

◇험난한 귀향길=7년간의 성노예 생활 후 그들은 나를 만기제대 시켜줬다. 싱가포르로 나오니 새로운 어린 여자들을 가득 실은 배가 막 들어오는 걸 목격했다. 제대할 때 팔, 다리가 하나씩 없는 부상당한 일본 군인들과 함께 나왔다. 한 달 후 커다란 군함이 왔는데 제대한 성노예자들과 부상병 등 모두 합쳐 수 백여명이 되었다.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 유골상자는 기미도부꼬(물 위에 뜨게 하는 부의 일종)와 묶어 배 2층으로 하루 종일 운반했다. 우리가 탄 큰 군함를 기점으로 사방에 작은 배 17척과 비행기 한 대가 호위했다. 다른 배에 탄 한국인을 발견하면 옷을 흔들어 생존을 확인하며 기뻐하기도 했다. 배 안에서는 매일 훈련을 받았다. 훈련 내용은 배가 파산되면 낮은 곳 대신 높은 곳으로 가라는 것과 기미도부꼬 입는 법, 흰 가제 차는 법, 여러 명이 밧줄을 잡고 생존하는 법 등을 밤낮없이 훈련시켰다. 모두 일본말로 했고 다 알아들었다. 흰 가제 차는 법은 물에 빠지면 상어밥이 되니, 이 것을 허리에 차고 물에 일렁이면 상어가 덩치 큰 물고기로 여겨 덮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웠다.

20여 일을 항해하던 중 미국 잠수함이 물 밑에서 폭발물을 수없이 터트려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는 배가 옆으로 기울자 훈련할 때 배운 대로 ‘기미도 부꼬’를 재빨리 입고, 높은 쪽 배 갑판을 붙잡고 있었다. 이미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이 다리를 잡아 당겨 물속으로 몇 번이나 빠졌다가 나오기를 반복 했는데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수영을 해 겨우 기울어진 배를 잡고 있으니 배가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폭발하면서 뒤집어졌는데 그 때 머리를 크게 다쳤다.

물 위에서 24시간 넘게 나무판자를 잡고 떠 있으니 일본군 배가 와서 생존자를 구조하는데, 또 다시 미군 폭발물이 터질까봐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 모여 있는 팀만 급하게 구조했다. 구조될 때 생존자들을 고기 집어 던지듯 해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구조돼 바다를 보니 유골함과 시체가 수없이 많았고, 심지어 생존자 3~4명 모여 있는 팀이 있어도 모두 구조하지 않고 지나갔다.

싱가포르에서 처음 출발할 때 18채나 되었던 배는 거의 다 폭발하고, 파손 안 된 한 척과 뒤 부분이 불에 타서 반쪽만 남은 배 등 모두 2채만 남았고 생존자들도 150여 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실은 배는 말레이시아 보루네오 어느 섬으로 들어가 약 6개월 가량 숨어 지냈다. 먹을 게 없어 구렁이, 도마뱀, 개구리, 바나나나무 줄기 등을 먹었는데 배가 고프니 그런 것들도 맛있게 먹었다. 소금 섭취를 못하니 시퍼런 물집이 크게 생겨 그게 터지니까 죽는 사람도 있었다. 물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 찾아가면 시체가 둥둥 떠 있었지만 살기 위해 그 물도 마셨다.

칼 달린 총을 지닌 일본군 생존자들은 아픈 군인들을 먹이려 벼줄기를 꺾어오면 찧어 죽으로 먹였고 남으면 우리들한테 배급했다. 매일 미국 비행기가 폭격을 해서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시체 옆에 숨어 새우잠을 자면서도 살아서 고향에 가기 위해 도망을 다녔다. 한번은 현지인이 버리고 간 집 2층에 자다가 미군 비행기 폭격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를 뒤늦게 듣고 일어났고 살기 위해서 2층에서 바로 뛰어 내렸는데 그 때 이빨이 거의 깨졌다. 폭탄 파편이 코와 다리에 박혀 지금도 다리가 몹시 아프다. 배 파산, 산속 생활, 폭격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도 살아남으니 본인만 따라다니면 안죽는다는 소문이 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다=도망을 다니던 어느 날 미국 비행기가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해방이 됐으니 산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은 이제 나와도 되다’라는 내용이 적힌 삐라(전단)를 뿌렸다. 미군들이 산속에 군용차를 타고 와서 생존자들을 구조했고, 일본군인이 타려면 못 타게 했다. 여자들을 먼저 태우고 남은 자리가 있으면 일본군인을 태웠다. 미군 천막 속에서 6개월간 포로로 잡혀 생활했는데 식사도 잘 나왔고 인간대접을 해주었다.

포로생활 동안 한국 사람이 조사관이었고 양손 모두 지문을 찍었다. 포로 생활이 끝난 후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여자들만 배를 탔는데 미군이 총을 들고 보호해주었다. 일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때도,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진주로, 다시 사천 곤양면까지 갈때도 버스로 실어다 줬다.

곤양에서 진교외가까지 산길을 걸어가니 죽은 줄 알았던 손녀가 살아오니 온통 울음바다였고 다음날 밤에 걸어서 고향에 도착하니 온 식구가 대성통곡하고 고전면 일대가 떠들썩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끝나지 않는 고통(동생의 눈에 비친 언니의 모습) =1946년 음력 2월, 7년 만에 돌아온 언니의 모습은 일본 군인들이 입는 낡은 바지에 낡은 잠바, 마크가 붙은 따개비 같은 모자가 전부였고, 머리도 군인같이 앞머리가 짧았다.

아버지는 언니가 입고 온 옷가지와 모자를 남들 볼까 부끄럽고 또한 무섭다면 당장 불에 태워 버렸다. 얼굴은 누렇게 떠서 죽을 상 같았고, 이빨도 까만색으로 변해 죽 밖에 먹지 못했다. 쿨럭쿨럭 깊은 기침을 끊임없이 했고, 누런 가래와 핏덩이가 입과 코에서 쏟아졌다. 머리가 짧아 석달 동안 집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잘때도 수건을 쓰고 잤다. 팔과 다리에는 포승줄에 묶인 자국처럼 잘록잘록 들어간 흔적이 많았고, 온 몸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있었다.

조금만 큰 목소리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래지며 벌벌 떨었고, 주눅이 들어 말도 크게 못했다. 또 편히 앉지도 못하고 항상 방구석에 웅크린 채 구부리고 앉아 있었고 밥도 눈치를 보며 먹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끌려가서 무얼했냐”고 물으면 군대 생활을 했다는 말만 했다. 군생활에 젖어 평생 바지만 입었고, 몇 발자국만 걸어도 ‘아야’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1995년, 평생 몸과 맘이 아픈 채 돌아가셨다.

정리=정희성기자

 
김순이 할머니(왼쪽에서 세번째)가 생전에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김순이 할머니는 7년 동안의 악몽으로 평생 바지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사진제공=정인후 진주시의원


“日 진정성 있는 사죄 꼭 필요” 
■조카 정인후 시의원의 회상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은 후 ‘이제 한(恨)을 풀어 편안하다’는 이모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정인후 의원은 1994년, 이모인 김순이 할머니에게 일제강점기때 싱가포르로 끌려가 7년 동안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일들을 받아 적어 문서화 했다.

1년 뒤인 1995년, 김순이 할머니는 정부로부터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정인후 의원이 문서화 한 내용은 현재 부산국가기록원(관리번호 BA0716233)에 보관돼 있다.

정 의원은 “1995년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며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에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를 세상에 공개한 뒤 나라 전체가 들썩일 때, 당시 이모가 저에게 작은 사진 몇 장을 보여줬다. 사진 속에는 중국 옷, 일본 옷을 입은 여자 7~8명이 무표정하게 나란히 서 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모를 설득해서 경험담을 들었다. 일본은 어린 딸들을 강제로 끌고가 7년 동안 성노예생활 시킨 후 제대시켰다”며 “구술 내용으로 진주시로부터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을 받고 이모는 다음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전쟁터에서 생환하지 못하고, 또 가슴 속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식민지 어린 위안부 피해자들의 영면을 빌며 다시 한 번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바른 역사 인식을 촉구한다”고 했다.

정희성기자

 
정인후 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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