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제말 성주대첩의 영웅
장군 제말 성주대첩의 영웅
  • 경남일보
  • 승인 2019.08.1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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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영조 13년(1737년) 1월 17일 밤이었다. 성주목 찰방 정석유가 관청 청사 뒤에 있는 지이헌에서 책을 읽다가 얼핏 잠들었는데, 사모관대를 갖춘 장대한 사람이 대숲에서 걸어 나와 “나는 고성 출신 제말이란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성주목사를 제수 받았다. 당시 경남 웅천 근해와 솥고지 부근에 있는 왜적을 모조리 섬멸했건만, 내가 전사한 뒤로는 누구도 내 이름을 말하는 이가 없고 사적에도 기록되지 않았으니 원통하다. 유명한 정기룡 같은 이는 그때 나의 부하였다.”

제말은 관운장처럼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더니 통절한 목소리로 시를 한 수 읊었다.

산이 깊숙하매 구름도 함께 가고/하늘은 드높아라 달빛조차 외롭구나./쓸쓸한 성주고을 관사 속에서/나의 어두운 넋은 있는 듯 없는 듯.

이윽고 제말은 “내 무덤이 칠원 땅에 있기는 하지만 자손이 없으니 지켜 주는 이조차 없구나!”하면서 대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석유는 이튿날 꿈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전했다. 성주목사 홍응몽이 성주목사 명부를 뒤져 보니 제말이란 이름이 있는데, 그 출신이나 공적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감사 정의하가 정석유를 불러 자세한 내용을 알아본 뒤 나라에 보고하려 했으나, 곧 전근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칠원 고을에 통문을 보내 제말의 무덤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도록 통문을 보냈다.(조선몽, 이상각)

임진왜란으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경작지는 1/5로 줄었고 잇따른 천재가 겹쳐 영조 대에 가서야 회복되었다. 문화재의 손실도 컸다. 특히 춘추관에 보관하고 있던 전적들이 불타 없어졌다.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탔으며, 민가에 전하는 귀중한 전적과 문서들도 불타거나 왜군이 약탈하여 대부분이 없어졌다. 장군 제말은 임진왜란 개전 9개월 동안 전투에 임했다. 전세가 패전을 거듭하던 시기라서 장군의 전공은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얼마나 한이 깊어 꿈에 나타났겠는가!

장군 제말이 전사한 지 200년이 지나 임진란에 공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해 누락된 공신들을 다시 포상하려 할 때, 성주목사로 임용된 것을 근거로 추증되고 시호를 받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6년(1792년) 7월 25일. “또 빠진 듯한 감상(感想)이 있어서 한번 전교하고자 한 지 오래이다. 절의가 충무공과 같고 공이 충무공과 같으며 또 무후(제갈량의 시호)의 후예로 지금까지 제씨(諸氏) 성을 답습해 왔고 그 이름이 ‘말’이란 자는 고 성주목사가 그이다. 그걸 이어받은 자가 바로 홍의장군 곽재우인데 재우는 갖추 숭보(崇報)하였으나, 제말이 고성(固城)을 보장하고 진양(晉陽)에서 부의(赴義)한 위대한 공훈은 고 감사 김성일의 천거에서 볼 수 있고 조정에서 격식을 넘어 탁용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 후 ‘성주의 대첩(星州之大捷)’에서 죽었으니 참으로 충무공의 노량사적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손이 영락하여 조정에 스스로 아뢰지 못하였고 끊어진 유사가 대략만 고 정승 남구만의 문집에 보일 뿐이다.

충장공 김덕령 형제가 자란 마을 이름에 이미 생계를 오두로 바꾸도록 명하였는데, 유독 제말과 그 조카 선무공신 홍록을 똑같이 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가 성인(成仁)한 곳에다 정표(旌表)하는 비석을 세우고 대서특필하기를 ‘증 병조판서 시호 제말과 선무공신 증 병조참판 제홍록 숙질이 함께 충성을 바친 곳’이라 하고,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음기(陰記)를 쓰게 하여 불후의 밑천이 되게 하라.”

세월은 대나무 잎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진 지이헌, 외로운 길손 시를 읊던 청운루는 비바람에 흔적조차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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