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5] 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서(3)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5] 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서(3)
  • 박성민
  • 승인 2019.08.2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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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드렌테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고흐가 돌아온 곳은 결국 부모님의 품이었다. 그 사이 고흐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남부지방의 뉘넨(Nuenen)으로 자리를 옮겨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런 고흐의 등장도 놀라운 일이었겠지만, 그의 덥수룩한 머리와 후줄근한 차림새를 항상 품위와 격식을 갖춘 생활을 하던 그의 부모님과 연결 짓는다는 것이 더욱 큰 관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

고흐는 목사관 뒤편에 붙어있던 조그마한 별채를 작업실로 쓰며 다시 그림 그리기에 몰두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부모님과의 갈등과 잦은 언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고, 마을 근처에 혼자만의 작업실을 얻게 되었다. 이곳저곳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사람이 그리워 부모님의 곁을 택했던 고흐였지만, 결코 평화롭지 못했던 그의 일상은 마곳(Margot)이라는 여인으로 인해 위태로울 지경까지 치닫게 되었다. 마곳의 부친은 고흐의 아버지가 목사로 부임하기 직전에 뉘넨 교회의 목사를 지내다 퇴직했다. 그의 딸들은 고흐의 가족들이 살고 있던 목사관 옆 건물에 살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마곳과 고흐는 자주 얼굴을 마주치며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모양. 이후 둘은 결혼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지만, 마곳 집안의 반대로 더 이상 만남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억지이별은 누구에게나 큰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줬을 터. 그런 아픔을 경험한 바 있는 고흐는 이내 이겨내는 듯 했으나 마곳은 자살 시도를 하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 속에서 빠져 나가고자 했다. 다행히 고흐의 발견으로 큰 비극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고흐는 마을 사람들의 입에 더욱 오르내리게 되었다. 평생을 신도들로부터 존경받고 덕망 있게 살아온 고흐의 아버지는 불편한 이목을 집중시키는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천재화가도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인 그저 ‘아들’ 고흐였다.


◇프랑스에 ‘아를’이 있다면 네덜란드에는 ‘뉘넨’이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조그마한 공원이자 광장 중심에 서있는 익숙한 동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오늘날 고흐의 초기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마을전체가 하나의 박물관과도 같은 뉘넨은 고흐의 삶을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되는 마을이다. 고흐의 인생 말년에서 프랑스 아를에 머물렀던 시기를 빼놓으면 그의 명작들을 살펴 볼 수 없듯, 고흐만의 분위기가 나타날 즈음인 뉘넨에서 활동한 시기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고흐는 뉘넨에 약 2년간을 머무르며 마을의 풍경뿐만 아니라 소작농과 방직공으로 주된 수입을 얻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캔버스에 담았다.

이 때문에 마을에는 고흐가 이젤을 세웠던 장소와 그가 머물렀던 곳들을 소개 하는 팻말들이 가득하다. 고흐의 시선이 되어 고흐의 캔버스에 담긴 풍경을 실제로 보는 느낌은 작품이 걸려 있는 미술관에서 고흐를 느끼는 것 보다 훨씬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빈센트레(Vincentre)는 아마도 고흐 때문에 뉘넨을 방문한 여행객들에게 고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고흐의 작품은 소장 하고 있지 않지만,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와 각종 전시, 시청각 자료 등은 화가로써의 고흐가 아닌 인간 반 고흐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뉘넨에서 탄생한 작품들

먼저 교회를 떠나는 신도들(Congregation Leaving the Reformed Church in Nuenen)은 1884년, 캔버스에 유채, 41.5 cm x 32.2 cm,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하고 있다.

그림 사이즈만큼이나 작고 아담한 교회는 현재까지도 뉘넨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그림은 고흐가 다리를 다쳐 누워 있던 어머니를 위해 그렸으며, 부모님을 위해 그린 첫 작품으로 여겨진다. 고흐가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즈음에 쓴 편지에는 삽을 들고 있는 농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남겨진 그의 그림에는 교회를 막 나오는 신도들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수정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흐 자신도 한때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성직자가 되려고 노력 했었지만 결국에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아버지와는 갈등이 끊이질 않았던 사이였다. 그림에서는 애틋한 부자지간으로 지내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교회를 찾은 신도들로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유실되었다가 2016년 발견된 이후 정밀한 복원 작업을 거쳐 최근 다시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목사관(The Vicarage at Nuenen)은 1885년, 캔버스에 유채, 33.2 cm x 43 cm,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 중이다. 또 유명한 감자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은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2 cm x 114 cm,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하고 있다.

 
 
고흐는 이 그림을 두고 자신 있게 그의 첫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이전 작품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 그림에 견주어 본다면 이전까지의 그림들은 습작에 불과 했다는 의미 일 것이다.

1885년 4월 고흐는 처음으로 커다란 사이즈의 캔버스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감자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은 여러 습작들을 발판으로 삼아 그간의 노력에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실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실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구도와 인물의 자세 등을 선택했다. 감자를 집거나 커피를 따르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손모양만 따로 드로잉 연습을 하기도 하고 두상만을 지속적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특히 고흐는 고되지만 정직하게 삶을 살아가며 땅에서 양식을 일구어 내는 소작농들의 모습과 손을 꾸밈없이 나타내고 싶어 했다.

스스로 ‘작품’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이 그림의 완성은 고흐 자신에게 화가로써의 미래와 자신감을 안겨주었지만,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림에 대해 호평을 하는 이는 찾기 힘들었다. 동료화가였던 안톤(Anthon van Rappard)은 모델들의 자세나 표정이 뻣뻣해서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기 까지 하다는 악평을 쏟아 냈다. 동생 테오 역시 이 그림을 판매하기에는 색상과 분위기가 너무 어둡다며 좀 더 밝은 색을 사용하도록 권유했다. 이 그림에 기대와 애정을 너무 많이 쏟았기 때문일까.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안톤과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의 비평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작품이 고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고된 삶을 살아내야 했던 그림 속 감자 먹는 사람들을 흙 묻은 감자와 비슷한 색상으로 표현하며 그들의 정직한 삶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 고흐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주소: Berg 29, 5671CA, Nuenen
운영시간: 화~일, 10:00~17:00
홈페이지: http://www.vangoghvillagenuenen.nl/
입장료: 성인 8유로, 5세이하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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