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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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9.08.2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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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빗방울 김수업 교수를 평전으로 읽다(5)

중등교육 연구소 세워 교사 양성
소신으로 진주오광대 복원도 지지
치우치지 않고 멀리 보는 눈으로
늘 뜻을 세우고 길을 닦는 삶 살아
빗방울 선생의 제자 문정임 시인은 스승과 제자가 나누는 학문 공동체가 단단히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로써 풀었다.

“말꽃을 피워내고 놀이꽃을 피우고 사람을 키우는/믿음, 흔들림 없이 세상 모두를 안아라/안고 뜅굴고 팽팽하게 끌어당기란 말이다/힘 없고 보잘 것 없고 수고하고 짐을 진 자들 그 사람들의 말들/서러운 국어에 운명을 걸어라/거미줄 시시한 줄이 아니라 동아줄 튼튼하게/참된 것은 참된 것끼리 착한 것은 착한 것끼리/어여쁘면 어여쁜 대로 한 세상 바쁠 일이다//-문정임의 <지금은 국어의 시간>에서

빗방울 선생과 제자들은 이러한 관계의 내밀함으로 이어져 학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겨레의 바탕에 언어라는 삶을 결곱게 아로새기는 것이 관계에서 만들어진다는 믿음이므로 그것은 거룩하다.

‘빗방울 김수업’에 글을 쓴 이들은 한결같이 빗방울 선생의 업적과 공로에 대해 즐겨 기록하고 있다. “김수업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사범대학 교수들과 의논하여 중등교사를 양성하는 사범대학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중등교육연구소’를 만들었다. 초대 연구소장이 되어 연구소장을 세 번 연임하여 무려 6년간 연구소를 이끌면서 사범대학의 위상, 사범대학 교수의 역할, 또한 중등교사 양성 교육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갖가지 연구를 수행하게 하였다.”(조규태, 사범대학 역할 찾기)

“돌아보면 선생은 늘 뜻을 세우고 길을 닦는 삶을 살았다. 루쉰의 말처럼 한 사람이 가고 많은 사람이 함께 가면 길이 된다고 보았다. 2005년 1월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면서 그 길을, 신영복 선생의 말을 빌리면 머리로 가슴으로 하지 않고, 당신의 발로 함께 하였다.”(김미숙, 우리말연구소 사무국장)

“2012년 무렵 선생이 다시 진주로 터전을 옮기고 나서는 백석의 시를 새겨 읽는 공부를 했다. 선생은 한국문학에서 가장 돋보이는 우뚝함으로 홍명희와 백석을 꼽았다. 한국글쓰기회 연수에서 강연을 하고 글쓰기 회보에 백석 시에 관한 새로운 풀이를 하던 즈음엔 입말 모임 카페에도 원고를 올려주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었다. 단 두 행으로 되어 있던 백성의 시 ‘비’를 읽으며 비에 땅바닥으로 떨어진 아카시아꽃의 흰두레방석과 개비린내의 물큰한 감각을 깨쳐 느끼게 되었을 때부터 백석의 서정과 겨레말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푹 빠져들게 하였다.”(권유경, 경상대 사대 부설고 교사)

“2017년 선생과 마지막으로 모임을 가졌던 날의 수첩에는 사람이 죽으면 상주 아닌 사람중에 누군가가 죽은 자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복! 복! 복! 세 번을 외치고 옷을 태운다는 얘기를 나누었다는 메모가 있었다.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며 우리 겨레가 모셨던 신이야말로 최고의 종교였다고 마무리했다.”(김정호, 경남과학기술대 강사)

“이오덕 김수업교육연구소는 그 뒤 선생의 책을 매주 읽고 연구하는 한 편 강마을산마을배움터라는 교사 연수를 열었고 연인원 몇천명의 교사들이 참여하였다. 그 자리에 선생은 두 번 오셔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강마을산마을배움터는 초등교사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자발적 연수로 자리를 잡았다.”(김강수, 전국초등국어교육교과모임 회장)

“빗방울 선생은 삼광문화연구재단 초대 이사장이 되어 첫사업으로 마을축제 되살리기와 진주탈춤 한마당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제를 거론했을 때 주변의 상당한 반대 의견에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문화사에서 이들이 지니는 가치를 꿰뚫어보고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 일을 해내려 했으며 윤회장 역시 선생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 덕분에 진주오광대놀이 복원이라는 사업을 이룰 수 있었다.(김태기,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필자는 상당한 세월을 한 시대의 스승인 김수업 교수의 주변에서 김교수를 자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아니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대학의 학과에서, 교수협의회에서, 가톨릭진주지구교수회에서, 문화재단에서, 성당에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모임에서 그분을 지켜보며 행보와 언어와 실천과 견고한 인격을 바라보는 복을 누렸다. 그분은 어떤 면에서나 깊이를 지니고 있었고 치우치지 않았고 멀리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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