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6]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6]
  • 경남일보
  • 승인 2019.09.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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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아서(4)
회색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_1887년작_반고흐미술관
회색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_1887년작_반고흐미술관

◇파리! 파리!

파리(Paris) 만큼 로맨틱한 도시 분위기를 뽐내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요즘은 사람들의 발길이 덜 닿은 여행지들이 각광 받고 있어서 파리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특별한 관광지에서 물러 난지 오래다. 그래도 파리만큼은 몇 번을 방문해도 ‘파리는 파리다’ 라는 진한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다. 아마 파리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에펠탑의 존재가 크게 한몫을 했겠지만 에펠탑이 건설 된 당시에는 많은 파리지앵으로부터 비판과 질책을 받은 바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어느 누가 에펠탑 없는 파리를 상상 할 수 있을까. 1886년 2월 에펠탑이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 한 화가가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스케치북 한 귀퉁이를 찢어 파리 화방에서 일하고 있던 동생에게 자신의 도착 소식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벨기에 앤트워프를 출발해 유럽에서 가장 중심이었던 도시에 발을 디딘 이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였다.

고흐는 뉘넨에서 그린 수많은 작품을 파리에서 있던 동생 테오에게 보냈다. 화방에서 일하며 인상주의를 포함해 다양한 색채와 새로운 기법의 향연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던 테오는 고흐의 그림이 유행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즉시 느낄 수 있었다. 테오는 고흐의 그림이 너무 어둡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어려워 판매가 어렵다고 조언 해주었지만, 땅과 흙을 상기시키는 어두컴컴한 색상의 사용으로 농민 화가의 뒤를 쫒던 고흐에게 파리의 화풍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흐는 테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계속해서 테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데다 화가로써의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림을 팔아서 수입을 만들어야 했다. 큰 도시로 갈수록 그림을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 여긴 고흐는 앤트워프로 갔으나 그림을 판매 하는 데는 실패했다. 드로잉 수업에도 참여 하고, 앤트워프의 풍경을 그리는 등 주제를 바꿔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의 그림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런 고흐가 파리 화방에서 해고 된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 파리에 왔다. 그 사이 많이 변한 파리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화가가 되어 돌아온 고흐 자신이었다.
 

몽마르트의 풍차와 시민농장_1887년작_반고흐미술관
몽마르트의 풍차와 시민농장_1887년작_반고흐미술관

◇예술의 중심 몽마르트(Montmartre)

몽마르트 언덕은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적 이점으로 파리 여행 필수 코스 중 하나다. 사크레쾨르 성당을 중심으로 무명 화가들이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들의 캔버스 안에서 파리 풍경을 또 한 번 감상 할 수 있으니 우리가 상상하던 로맨틱한 분위기의 파리는 이런 모습에서 비롯 된 게 아닌가 싶다.

고흐가 테오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도 몽마르트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흐가 살았던 시기의 몽마르트는 풍차 몇 대만이 돌아가고 있을 뿐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고 있는 지역에 불과해 파리 시내와는 확연히 다른 동네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값싼 음식점이나 카페들이 즐비했고 카바레, 댄스 홀 등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가게들이 주로 자리했다.

또한 몽마르트 주위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으며 미술재료상과 화방들이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 판매하기도 했다. 고흐는 이곳에서 머물며 알게 된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등 많은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자신의 그림에도 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림은 그림다워야 그림”

사진 기술의 등장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일은 기계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림은 사진으로 나타 낼 수 없는 것을 캔버스에 나타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된 것 이다. 그림은 더욱 그림다워야 했다. 고흐 역시 항상 죽은 채로 있는 사진은 화가의 깊은 영혼으로부터 완성되는 그림을 뛰어 넘을 수 없고 그림 그 자체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화가의 영혼을 담아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고흐가 파리에 도착한 1886년에는 인상주의가 이미 유행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고흐에게 인상주의 대표화가 모네의 그림은 네덜란드 화풍과는 매우 대조적이었고, 단 몇 번의 붓질로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깊은 의미를 두지 않는 관찰을 통해 순간의 느낌을 나타내는 표현법이 매우 새로웠다. 고흐의 팔레트를 구성하는 색상은 빠르게 변했다. 어둡고 칙칙한 색깔이 주를 이루던 팔레트는 밝고 선명한 색깔들로 가득 찼고 그의 그림은 훨씬 가벼워지며 다양한 색상이 주를 이루었다. 고흐는 색깔과 붓질을 여러 방법으로 실험해 보았고 쇠라, 시냐크와 조우하며 영향을 받아 선 대신 점을 찍어 표현하는 기법인 점묘주의 기법도 시도했다. 고흐는 계속해서 신인상주의, 상징주의, 자포니즘 등 여러 스타일과 마주 했다. 이것은 고흐에게 비단 색상이나 기법, 주제 등의 변화만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발견 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파리는 고흐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실험적인 곳이자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기도 했다.

과꽃과 글라디올러스가 있는 화병_1886년작_반고흐미술관
과꽃과 글라디올러스가 있는 화병_1886년작_반고흐미술관

◇스스로 모델이 된 자화상

고흐는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이전 시기에 비해 꽃을 주제로 한 정물화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가 이 두 가지 주제를 자주 선택한 것은 비용 문제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꽃은 어디서든지 구하기 쉬운 저렴한 소재였고, 자화상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게다가 모델을 구하는 일은 고흐에게 여전히 어려운 숙제였을 것이다. 고흐가 테오의 아파트에 머무는 동안 테오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것을 놓고 보아도 고흐의 성격을 참아내며 오랜 시간 동안 그림 모델을 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파리 시절 약 30여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화가로써 계속해서 변화를 실험하고 발전을 확인하기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고흐의 인생에 대해 가까운 친구와 가족만큼이나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썼던 편지 덕분이다. 특히 테오와의 서신은 고흐의 상태와 심경변화, 작품 진행 정도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시기만큼은 예외를 둔다. 두 형제가 같이 살면서 부터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파리에서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다. 다만 그가 파리를 떠난 이후 쓴 편지의 내용과 동료 예술가들이 언급한 고흐에 비추어 그의 삶을 짐작 해 볼 뿐이다. 그 대신 고흐가 남긴 200여점의 작품이 그가 이곳에서 보낸 2년여 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캔버스 위의 다채로운 색상은 마치 앞이 안보이던 화가가 마침내 눈을 뜨게 되어 세상의 모든 색과 마주한 기쁨으로 승화된 듯하다. 문득 고흐의 에펠탑이 궁금해진다. 설령, 에펠탑이 고흐의 파리 시절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하더라도, 고흐는 붓을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뜬 고흐가 아니었던가.

 

연인이 있는 정원_1887년작_반고흐미술관
연인이 있는 정원_1887년작_반고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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