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고수레
가을 고수레
  • 경남일보
  • 승인 2019.09.0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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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정재모
정재모

올 햇밤을 처서 무렵 일찌감치 맛보았다. 산길에 떨어진 밤송이를 운동화 발로 비볐더니 하얀 싸락밤이 제법 살이 차 있던 거다. 꽃 지고 앙증맞은 밤송이 생겨난 지 겨우 두 달 남짓 됐을까. 그듬새 열매를 먹게 해주는 자연의 섭리가 경이롭고 신기했다.

‘고쉬레에~.’ 버릇인가. 밤 한 톨을 뿌리듯 내던지며 고수레를 외쳤던 거다. 아직 못다 굵고 떨어진 풋밤 몇 톨 발겨 쥐고 대뜸 습관처럼 튀어나온 행동이 스스로도 우습다. 고작 날밤 몇 개 까먹을 참에 고수레씩이라니!

고수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 허공에 던지며 누군가를 부르듯 그렇게 입소리를 내는 행위다. 그렇게 해야 뒤탈이 나지 않는다고 믿는 속신이다.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이 그러는 걸 보면서 따라해 왔다. 반드시 지켜온 신칙(申飭)이랄 순 없지만 야외 음식 앞에서 생각이 나면 그랬던 거다. 우리 부모, 부모의 부모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음식을 조금 덜어 먼저 자연에게 되준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겸손이 아닌가 한다. 무엇을 먹게 해 주신 그 누군가에 대한 감사이고 안전까지 지켜주십사, 앙망하는 염원이다. 들녘의 중참 고수레는 풍년을 비는 주언(呪言)도 곁들인다. 이런 점에서 고수레는 추석 차례나 음력 시월에 올리는 시사의 의미와 본질적으로 같다 하겠다. 서양의 추수감사제(Thanks giving Day) 또한 다르지 않다.

고수레 풍습은 멀리 중국 춘추시대에도 있었다. ‘공자는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일지라도 먹기 전에 반드시 과제 (瓜祭)를 지냈다’는 논어의 구절이 이 사실을 전해준다. ‘과제’는 맏물 오이를 조상신에게 먼저 바치고 감사드리는 간단한 제사다. 따라서 공자가 식사 때마다 과제를 지냈다는 말은 곧 고수레를 잊지 않았다는 의미다(유종목/논어의 문법적 이해).

추석연휴가 이번 주에 들었다. 일요일까지 겹쳐 나흘간 이어 쉬게 된다. 어제가 흰 이슬 맺히는 백로 절기였지만 햇살은 아직 이마에 따갑다. 더위가 남아 오곡백과가 다 여물지 않은 철에 추석을 맞는 거다. 너무 일찍 들어 그런지 추석 냄새가 덜 나는 듯도 싶다. 이차판에 지난 한 주 내내 건들장마에 태풍마저 겹쳐 농사를 집적였다.

그래도 대목장에는 밤 배 감 대추 사과 들이 진열대에 즐비하다. 감사할 일이다. 비록 덜 영근 과일들이지만 올가을 맏물이란 점에서 차례 상에 올리는 것으로는 더 알맞을 수도 있겠다. ‘고수레에~, 올 추석도 우짜든지 무사무탈, 화평하고 안전하고 넉넉한 명절 되게 해 주시고…’

정재모(전 경남일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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