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취월장 진주 경제[16] 철학으로 본 기업가정신-성리학과 남명 경의 사상(2)
일취월장 진주 경제[16] 철학으로 본 기업가정신-성리학과 남명 경의 사상(2)
  • 정희성
  • 승인 2019.09.0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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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경남 기업가 정신의 뿌리 ‘경의(敬義) 사상’
기업 이윤, 사회 환원 필요성 강조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 경상대 기업가추진단 공동기획
 
 

재산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위해 옳은 곳에 잘 베푸는 것도 기업인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남명 조식이 몸소 실천하고 본보기로 보였던 경의(敬義) 사상에 바탕을 둔 기업가정신이다.

조선은 500여년 유교의 나라이고 성리학, 주자학의 나라이었다. 그리고 서부경남의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준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은 이 지역의 리더들에게 오랫동안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삼성그룹의 호암 이병철 회장, LG그룹의 연암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의 만우 조홍제 회장, 남성문화재재단 김장하 이사장 등 서부경남 기업가정신으로 이어져 왔다. 오랫동안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한 이상호 경상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남명의 경의 사상과 이들의 기업가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명 조식의 생애와 우국애민(憂國愛民) 정신

남명 조식은 시대의 어른으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인물이었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데 머물지 않고 대책을 마련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던 참된 지성인이었다. 남명 조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조안습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 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의 딸이다. 2남 4녀 중 장남으로 1501년 음력 6월 26일 합천군 삼가면 토동(兎洞) 마을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음력 11월 25일에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남명은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좇아서 의흥(義興)·단천(端川)에 가기도 했으나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했다. 남명은 불교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용했으며 병법, 천문, 지리, 역사, 산술 등 다양한 사상에 대해 열려있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30세 되던 1530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충순위 조수(曺琇: 남평 조씨)가 김해 일대에서 부자로 소문났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됐다. ‘높은 산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의미를 지닌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으며, 이 때 호(號)를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남쪽 큰 바다를 지칭하는 ‘남명’으로 지었다. 45세가 되던 명종 1년(1545년) 을사사화로 이림·송인수·성우·곽순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살이를 했다. 48세 때인 1548년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 생활을 청산하고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갔다.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부화해 나오듯 차분히 침잠해 학문과 인격을 함양한다’는 의미를 지닌 계부당(鷄伏堂)과 ‘시동처럼 가만히 있어도 용처럼 드러나고 깊은 연못처럼 침묵해도 우레처럼 소리가 난다’는 뜻을 지닌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했다. 61세 때인 1561년 삼가현 토동에서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세워 자신과 제자들의 거처와 강학의 장소로 사용했다.

68세 때인 선조 1년(1568년)에 임금으로부터 부름이 있었으나 ‘무진봉사(戊辰封事)’의 상소를 올리고 사양했고 69세에는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대신 민생 구제가 급선무인데도 조정의 논의에 성리설만 무성할 뿐 실제로 받는 혜택이 없음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다.

70세에 임금이 다시 벼슬에 나오라고 불렀지만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알고 사양했다. 71세에는 임금이 경상 감사를 통해 남명에게 음식을 내려 보내었으며, 남명은 상소해 사례했다. 12월 21일 갑자기 등창으로 병을 얻었다. 다음해 1월에 옥계, 노진, 동강, 김우웅, 한강, 정구, 각재 등이 찾아와 문병했다. 이 때 자신이 죽은 후 칭호를 처사(處士)로 하라고 제자들에게 일러두었다. 처사는 벼슬하지 않고 재야(在野)에 있는 선비를 칭하는 말이다. 남명 조식은 2월 8일 산천재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선조는 크게 슬퍼해 신하를 보내 사제(賜祭)하고 곡식을 내려 부의했으며,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贈職)했다.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오늘날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한다. 어른은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도덕적 원리인 인(仁)을 갖추어야 한다. 인을 몸으로 체득해 인의 마음이 몸 밖으로 베어 나온 사람은 도덕적 공감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기꺼이 도와주게 되고 공감대를 얻어 다른 사람의 어른이 될 수 있다.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도덕적 원리로서 인이 바르게 발현되면 주변의 불쌍한 사람에 대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나랏일을 근심하고 백성의 삶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나오게 된다. 남명은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 간 우애가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이 죽거나 상(喪)을 당하면 자신이 당한 것처럼 애통해 했으며, 물에 빠지거나 불에 덴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동시에 평생 세상을 잊지 못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했으며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겼다.

시세(時勢)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남명은 어지러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 수수방관하지 않고 상소를 통해 당시 사회가 처한 모순과 부패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대안을 제시했으며, 임금이 솔선수범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도록 건의했다. 하지만 남명의 충언에 대해 임금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위정자들의 안일한 대처에 실망한 남명은 제자들에게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계책을 물었고 닥쳐올 침략에 냉철하게 대비하도록 했다.

남명 사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곽재우, 정인홍, 김면, 이로 등 제자들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계책을 강구해 두었기 때문에 의병장으로 나라를 누란의 위기를 구하는 데 솔선수범할 수 있었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왜적의 침략에 대비한 계책을 물었던 남명의 탁월한 선견지명과 스승의 혜안을 믿고 왜적의 침략을 대비했던 제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명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지조를 지키고 절의를 실천한 올 곧은 선비였으며, 솔선수범으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이정표를 제시한 선각자이면서 참 스승이었다.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질 때 생명력이 있음을 증명한 남명의 삶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올바른 실천이 절실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 어른이 사무치게 그리운 시대이다.



 
성성자와 경의검.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敬義思想)과 기업가 정신

경(敬)은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고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면 바깥의 외물(外物)에 대해 함부로 동요되지 않게 된다. 경이 몸에 베이게 되면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기 때문에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지 않게 된다. 경을 통해 내면이 곧고 바르게 되면 의(義)로써 내 바깥을 방정하게 할 수 있다. 의는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도덕적 원리인 인(仁)에서 나온 것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사리(事理)를 판별하는 올바름을 의미한다.

남명은 18세 때 서울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해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살던 청송 성수침(1493~1564)과 그의 사촌동생인 성운(1497~1579)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부터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꿇어앉아 두 손으로 받쳐 들고서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은 채로 밤을 지세우면서 자신의 뜻을 가다듬은 것과 띠에 성성자(惺惺者)라는 쇠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방울소리가 들릴 때마다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성성자란 방울과 함께 남명은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새겨 놓은 경의검(敬義劍)을 품고 다녔다. 성성자가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항상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경의검은 ‘경’을 통한 내적 수양을 바탕으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사회적 모순에 대해 칼로 자르듯이 정의를 실천하려는 남명의 결연한 의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남명의 성성자는 그의 제자 김우웅(1540∼1603)에게 물려주었고, 경의검은 정인홍(1535∼1623)에게 물려주었다.

남명 사상의 핵심인 경과 의는 덕천서원 경의당(敬義堂)에서도 엿볼 수 있다. 덕천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 공간의 중심 건물인 경의당이 자리 잡고 있다. 경의당은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남명이 평소 중시했던 경과 의(義)의 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다. 덕천서원은 경과 의를 강조했던 남명 조식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 문인들이 세웠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2년에 중건됐고 1609년에 조정에서 선생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사액(賜額)되자 크게 확장해 옥산서원·도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서원(三山書院)으로 불리었다.

정조 때의 명 제상 채제공(1720~1799)이 원장을 지내는 등 성황을 이루었으나 대원군 때(1865년) 훼철되는 비운을 격기도 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26년에 복원한 것이다. 곽재우, 정인홍 등을 비롯한 남명의 제자 50여 명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으로서 내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내 바깥을 방정하게 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의병장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 분연히 일어났다. 남명의 경의(敬義) 사상은 안희제 선생,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LG그룹의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의 조홍제 회장, 남성문화재재단 김장하 이사장 등 서부경남 기업가정신으로 이어져 왔다.

백산 안희제는 국내·외 독립 운동 자금 조달과 일본의 자본에 맞설 수 있는 민족 기업 발전을 위해 1914년 9월 고향의 전답을 팔아 이유석·추한석 등과 함께 부산에 백산 상회를 설립했다. 확장을 거듭한 백산 상회는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 상회에서 1919년 5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고, 대구·서울·원산·만주의 안동과 봉천 등지에 지점과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3·1 운동을 전후해 안희제는 남형우 등과 국내·외 독립 운동을 위한 연락을 담당했으며,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제작해 독립 운동을 지휘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희제는 임정 첩보 36호의 총책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수시로 전달함으로써 임정의 재정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당시 백산무역은 상해임시정부 운영자금의 60%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아들 이건희에게 ‘논어(論語)’를 읽어 보라는 부탁과 함께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부회장이 되던 37세 때 ‘경청(傾聽)’을 평생 좌우명으로 남겼다. ‘경청’은 주변 사람들의 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진심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LG그룹의 구인회 회장은 일본 식민지 시대 막대한 돈을 독립자금으로 쾌척했다. 구인회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인간 존중의 경영’으로 발전한 ‘인화단결’이다. 인화단결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화합하며 한마음, 한 뜻으로 여러 사람이 한데 뭉쳐 단합하는 것이다.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 등의 말이 이런 기업가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효성그룹의 조홍제 회장은 스무 살 때 6·10만세운동을 주동해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그의 독립 운동 정신은 후계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국립 현충원 1사 1묘역 자매결연 및 6·25참전 국가 유공자들의 집을 수리해주는 등 다양한 호국보훈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은 이윤 창출과 이윤을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존경받는 기업인은 합리적인 사고와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배치해 이윤을 창출하고, 창출된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는다.

이같은 남명 조식이 몸소 실천하고 본보기로 보였던 경의(敬義) 사상에 바탕을 둔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품격 있는 사회, 행복한 사회로 도약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오기를 학수고대해본다.

정리=정희성기자

‘일-취-월-장 진주경제’ 프로젝트는 경남일보, 진주경제발전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인철), 경상대학교 기업가정신추진단(단장 정대율 교수)이 공동으로 진주지역 출신 기업가들의 혁신적인 기업가정신 뿌리를 탐색하고 정립해서 위기의 한국경제-진주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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