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의 재조명[상] 뜨거웠던 그날의 함성
부마항쟁의 재조명[상] 뜨거웠던 그날의 함성
  • 이은수 기자
  • 승인 2019.09.17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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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대항 시민항쟁 민주화운동의 분수령
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간 학생·시민 동참
진주선 경상대·대동기계공고 등 1000여명 시위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종지부를 찍고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오게 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 등 경남 일원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해 발생한 민주화운동으로 유신시대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항쟁으로 꼽힌다. 이런 가운데 부마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됨에 따라 정부 주관 기념식 등을 통해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본보는 부마항쟁의 의미와 앞으로 과제를 3편에 걸쳐 게재한다.

부마항쟁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한 세대가 넘는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여러요인들이 얽히고 섥혀 부마항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여전히 현재의 과제로 남아 있다. 1979년 부마항쟁은 최대 규모의 유신반대투쟁으로 4월 혁명 이후 대중적 궐기의 전통을 복원시켜 1980년대 시민항쟁의 거대한 흐름을 매개했고, 이로써 권력층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켜 유신체제를 안으로부터 붕괴시켰다. 이 과정에서 학생시위는 학생층 내부의 대중성을 획득하고, 대중적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 내면서 지역사회의 정치의식을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성공했다.

◇ 발단, 1만여명 대학생의 시위
지금까지 부마항쟁의 전체상은 명료하지 않다. 발생부터 진행과정,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기초적인 사실에 대한 규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은 대학생 시위에서 촉발됐다. 이는 그 자체로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다. 1970년대 말은 대학생 자체가 희소하던 시절, 1만여 명에 이르는 대학생이 운집한 대규모 학생시위는 그 자체로 지역주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100년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초유의 상황으로, 유신체제의 억압성과 비민주성에 대해 비판적인 학생들은 10월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교내 곳곳에 ‘민주선언문’ 1000여장을 뿌렸지만 득달같이 달려온 경찰과 교직원의 의해 해산됐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학습효과를 낳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따라서 16일 시위는 15일 실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15일의 좌절은 16일 시위가 성공한 요인이 됐다.

◇ 전개, 시민참여로 ‘민중항쟁’ 불씨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교내 시위 불발에 이어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 교내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가 발단이 됐다. 도서관 앞은 함성으로 솟구쳤다. 주동자를 체포하려는 사복경찰의 시도는 시위에 불을 지른 결과가 됐다. 500명으로 시작한 시위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재료관 앞을 지나 운동장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는 2000명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페퍼포그와 무장기동대를 앞세운 경찰은 시위대를 쫓아 최루탄과 곤봉으로 캠퍼스를 유린했고, 이는 관망하고 있던 대학생들을 격분시켜 시위에 합류케 했다. 11시 경찰에 쫓겨 도서관에 다시 집결한 시위대가 ‘민주선언문’ 낭독과 구호 제창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독수리탑을 거쳐 재차 운동장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 규모는 5000명을 넘어섰다. 이날 학생들은 교외 진출을 시도해 오후 1시 30분경 광복동 일대 도심으로 진출했고, 이후 시위는 시민들의 참여와 호응과 함께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면서 도심전역으로 크게 확산됐다. 또 10월 18일 마산으로 옮겨 붙은 항쟁의 불꽃도 경남대학교 학생 시위에서 비롯됐다.

◇ 확산, ‘부마’에서 진주 대구 서울로
부마항쟁이 다른 지역의 유신반대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은 이 사건이 지닌 역사적 위상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마항쟁은 진주와 통영, 나아가 대구와 서울에 이르기까지 호응과 파장을 일으켰다. 부마항쟁의 범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부마항쟁의 의의와 관련,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부산에서 시작된 유신반대투쟁이 마산으로 확산됐던 18일과 19일 진주에서도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학생시위에 이어 시민들이 참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의 선두에 선 것은 경상대와 대동기계공고 학생이었다. 19일에는 시위대 규모가 1000여명에 이르기도 했고, 대동기공의 경우 전교생이 학교로 나와 대로변까지 약1㎞ 가두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26일에는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통영수산전문대학(현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학생 400∼500명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유신철폐’ ‘수산인의 권익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남망산공원까지 4㎞이상 가두시위를 벌였다. 3·1운동 이후 처음이라는 통영의 학생시위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진행됐다. 부마항쟁의 영향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은 유신정권을 매우 곤혹스러게 만들었다. 경찰과 계엄군의 폭행 압송과 고문 및 사건 조작은 국민적 공분을 샀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부마항쟁에 참여한 학생이건 시민이건 아무도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질 줄 몰랐다”며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의 격렬한 전개는 유신말기 언론의 자유와 인권 및 학원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외세의존성과 빈부격차 심화, 의회질서 파괴 및 민중의 정치참여가 배제된 암울한 사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분출이었다”고 했다.

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경남대학교 학생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경남대학교 학생들.
대학 밖으로 나온 경남대학교 학생들.
대학 밖으로 나온 경남대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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