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의 눈물겨운 부자 상봉길
고려 현종의 눈물겨운 부자 상봉길
  • 경남일보
  • 승인 2019.09.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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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식(LH 지역상생협력단장)
 
현종(顯宗, 992~1031)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지만 거란의 2, 3차 침입을 물리쳐 초기 고려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직의 기틀을 세웠다. 경제기반을 튼튼히 하고 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무신들의 발호를 가차없이 제압한 냉혹한 군주로도 기록되어 있다. 현종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 욱(郁)이고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5대 경종의 계비 헌정왕후다. 태조의 아들과 태조의 손녀가 숙질(叔姪) 사이 사통(私通)으로 낳은 아들이 바로 현종이다.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은 직후 죽고 왕욱(王郁)은 사수현(지금의 사천시 사남면)으로 귀양을 내려온다. 성종의 배려로 아들 왕순(王詢, 현종)도 2살 때 사수현으로 내려온다. 순은 아버지 욱이 죽자 그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가지만 천추태후의 견제를 받는다. 10대 몇 년간 강제로 승려가 되고 수시로 자객의 방문을 받지만 위기를 모면한다.

드디어 1009년 강조(康兆)의 난으로 목종에 이어 8대 왕으로 오른다. 그러나 이듬해 1010년 강조의 난을 핑계 삼은 거란의 2차 침공을 받고 갖은 수모를 당하며 지금 혁신도시가 들어서 있는 전남 나주까지 몽진(蒙塵)을 간다. 이후 1018년 거란의 3차 침공을 받았으나 강감찬·강민첨의 활약으로 거란을 물리치고 1019년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강민첨(姜民瞻)은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태생으로 현재 진주 옥봉동 은렬사(殷烈祠)의 주인공이다(일부 자료는 은렬사가 탄생지라고 한다). 이름 ‘민첨(民瞻)’은 ‘백성이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영웅과 성군은 위기에서 빛나듯이 현종의 진가는 재위 중 2차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발휘한다. 거란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관군이 와해되었지만 곳곳의 장수들이 봉기하여 국토를 회복한다. 3차 침입 때 왕은 위험을 무릅쓰고 수비군이 거의 없는 개경을 지킨다. 3차 거란 침입을 격퇴한 양강(兩姜) 명장을 발탁한 것은 현종의 혜안이다. 그 후 뛰어난 외교력으로 100년 이상 외침 없는 평화시대를 닦았다. 송나라와도 평화로운 친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선조·인조·고종 등 국가 위기시 극도의 리더십 부재를 보여준 군주들과는 달리 현종은 2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평화의 반석을 쌓은 군주로 평가받는다. 조선말 임오군란과 유사한 최질·김훈의 난이 일어나자 일단 무신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난을 평정한 다음, 서경 장락궁 잔치에 무신들을 초청해 만취한 19명을 주살하여 복고(復古)에 성공한다.

성종은 욱을 사천에 귀양 보내고 그 뒤 순을 아버지 귀양지에 보내는 배려를 하지만 같이 살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남면, 아들은 정동면 배방사에 살게 된다. 아버지 욱의 유일한 낙은 10㎞를 걸어 아들 순을 만나는 것이었다. 매일 고개를 넘어 아들을 보고 되돌아 오며 또 고개를 넘었다. 아버지의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스며 있는 이 고개는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자봉(顧子峰)이고 마을 이름은 고자실이다. 아들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욱은 귀양 온 지 4년 만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아들 순은 4년을 살다가 개경으로 올라간다. 욱은 어린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거든 지관에게 부탁해 이 고을 뒷산에 복시이장(伏屍而葬)하라”. 시체를 엎어서 매장하라는 이야기다. 임금이 날 자리인데 더 일찍 발복하기 위한 것이다. 욱이 지금의 능화마을 뒷 산에 영면한 지 13년 만에 아들 순이 현종으로 등극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를 효목대왕(孝穆大王)으로 추존하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했다. 이후 아버지를 경기도로 이장하고 건릉(乾陵)이라 했다. 그리고 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로 승격하고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불렀다. 한 고조 유방이 반군을 진압하고 패주풍읍(沛州豊邑)에 들러 고향사람들과 같이 대풍가를 불렀다. 이성계도 황산대첩 후 선조의 고향 전주에 들러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왕조의 고향이란 뜻으로 사천과 전주가 풍패지향이라 불린다. 전주에 있는 조선전기 객사의 이름이 풍패지관이고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의 문은 풍남문이다. 옛 패서문(沛西門)은 수백년 동안 전주의 중심이었다. 풍패지향 사천의 학촌마을에는 부자상봉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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