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재조명[중] 마산 항쟁
부마항쟁 재조명[중] 마산 항쟁
  • 이은수
  • 승인 2019.09.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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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속 끊이지 않는 순수한 힘

3·15의거 후예들 자존심 들고 일어난 항쟁
10월 18일 하루만에 마산 시내로 시위 확산
유신독재 끝내고 새 시대 연 학생·시민 운동

부산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중 시위가 마산까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마산항쟁 첫날인 10월 18일 밤 10시를 전후해서는 마산 전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4·19혁명을 촉발한 3·15의거의 후배들이었음에도 활발한 유신반대 운동에 참여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해있던 마산(현 창원시) 대학생들은 지역적으로 깊이 연계돼 있던 부산에서의 항쟁 소식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민들이 가세하며 부마항쟁은 광주의 5·18과 6월 항쟁으로 매듭지어지는 반독재투쟁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 부산 항쟁소식에 즉각 반응한 경남대 학생들

경남대학 내에서도 부산에서 통학하는 일부 학생들을 통해서 부산 시위의 소식이 전해진 17일부터는 학내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18일 목요일 아침, 학교 정문 앞에는 부산항쟁의 소식과 비상계엄령 선포가 보도된 한국일보 100여부가 누군가에 의해 배포돼 있기도 했다. 4·19혁명을 촉발한 3·15의거의 후배들 이었음에도 활발한 유신반대 운동에 참여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해있던 창원지역 대학생들은 지역적으로 깊이 연계돼 있던 부산에서의 항쟁 소식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10월 18일 오후 2시 경남대 내 속칭 노인정 앞으로 수백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자 학교당국은 휴교령을 발표했다. 이후 학생들이 계속 모여들어 1000여명에 이르렀다. 오후 3시 30분께 정인권(국제개발학과 2년)이 “지금 부산에서는 유신독재에 항거해 피를 흘리고 있다. 3·15영령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자”며 격정적인 연설을 한데 이어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내시위를 시작했고,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 3·15 의거탑에서 “독재타도” 외쳐

시위가 전개됐으나 교문을 뚫고 나가기가 어려워지자 학생들은 이틀전 부산대 학생들과 비슷하게 시내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학생들은 3·15의거탑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오후 5시께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3·15의거탑 주변에 집결, “독재타도” “박정권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마산항쟁의 거센 불꽃이 타올랐다. 한 나라나 지역에 역사적인 자부심을 가질만한 경험을 두고 두고 기억돼 역사에 살아 있게 된다. 창원의 학생 및 주민들이 3·15의거를 기억해내고 3·15의거탑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후 3시 반쯤 경남대 교정에서 시작된 마산시위는 밤에 1만여명의 인파가 격렬한 시위를 벌여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계속 됐다. 군부대가 들어온 19일에도 저녁 8시경부터 격렬히 시위가 전개돼 20일 새벽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마산경찰서에서 1979년 10월 20일자로 작성한 실황조사서에는(18일부터 19일까지) 마산항쟁의 진압을 위해 마산경찰서 병력 및 경남경찰국 관내 경찰관 689명, 부산시경 기동타격대(전경대요원) 155명, 39사단 병력 859명 등 총1703명이 동원돼 진압 및 주모자 등 505명을 검거했다고 적혀있다.


◇ 격렬한 마산시위, 위수령 발동

18일 오후 7시 시내 중심가로 일반 시민들도 모여들기 시작해 본격적인 시민 항쟁이 시작했다. 시위대열은 오동동다리를 거쳐 산호동 공화당사를 부수고 민주공화당 경남도지부 현판을 불태웠다. 시위대는 이어 양덕파출소에서 박정희 사진을 불태우고 산호파출소 역전파출소 등에도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이후 마산시내 곳곳에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계속하면서 여러 곳의 파출소와 방송국, 시청, 경찰서, 소방서, 검찰청 등을 공격했다. 이날 시위는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밤 11시께 보병 39사단 병력이 마산시내 주요 공공건물과 시내 시위현장에 투입됐다.

10월 19일 오후 5시 부산에 파견돼 있던 공수부대 중 5공수여단 25대대 병력이 수십대의 트럭과 지프에 분승해 마산으로 급파돼 시내 일원에서 위력시위를 했다. 19일 오후 7시 마산 창동 일대에 모인 시민들이 유신철폐, 민주회복 등을 외치며 이틀째 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시민들은 창동 부림동 오동동 동성동을 비롯한 시내 중심가는 물론이고 3·15의거탑 주변, 북마산 회산교와 태양극장 앞, 어시장 일대 등 시가지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일부 시위대는 시청, 경찰서 방면으로 진출해 진압경찰과 충동했다. 이후 회원동, 북마산파출소 일대, 오동동 산호동 일대, 자산동 일대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 20일 정오를 기해 박정희는 마·창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부마항쟁은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었다. 4·19를 통해 이승만 독재가 막을 내렸듯이, 부마항쟁을 통해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했다.

김상봉 선생은 “부마항쟁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났다 끝난 개별적 사건이 아닌, 지금도 이어지는 대중이념의 가장 순수한 표출”이라며 “부마항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하는 까닭은 오늘에 이르도록 이 물음이 온전히 대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은수기자 eunsu@gnnews.co.kr

부마항쟁 당시 시가지 모습.
벽문.
부마항쟁을 다룬 당시 신문. 방화 등 폭동성격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경찰이 파악한 마산항쟁 시위 분포도. 총피해액이 2224만1260원이라고 적혀 있다.
시위대에 공격당한 산호파출소. 경찰 오토바이가 넘어져 있다.
시위대의 습격 받은 관공서.
부마항쟁 당시 시가지.
부마항쟁 당시 경남대학교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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