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어제와 오늘[12] 개천예술제 온 예술인들
개천예술제 어제와 오늘[12] 개천예술제 온 예술인들
  • 박성민
  • 승인 2019.09.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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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예술인들의 축제

초창기 국내 정상급 예술인 모여
14회 대회부터 심사위원 세대교체
세월에 따라 지역 연고 인사 참여
개천예술제에 참가한 예술인들은 심사위원, 실무위원, 초청연사, 예술발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다녀갔다.

그 면면을 살피면 왜 개천예술제가 전국적으로 명성이 있는 축제인지, 왜 진주 사람들이 자긍심을 갖는 지 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서울을 진주에 옮겨 놓았다 할 정도로 우리나라 정상급 예술인들로 북적거렸다. 제1회 대회 때는 문학분야에 구상, 오상순, 이경순, 설창수, 조연현, 박용구, 김윤성 미술분야에 박생광, 성재휴, 조영제, 홍영표, 정대기, 오제봉, 황매선, 정명수, 강주식, 우신출 음악분야에 이용준, 이상근, 이승학, 장규상 연극분야에 김수돈, 김상옥, 설창수 등이 남강변을 누볐다. 제3회 대회 때는 문학부에서 기존 멤버 외에 이원섭, 유치환이 추가되었고 미술부에서 서예가 정현복이 추가되었다. 연극부에서 정진업이 뉴페이스로 등장하고 사진부에서 현일영, 김종태, 박근식이 등장했다.

제4회 대회 때는 구상, 김춘수, 이경순, 유치환, 이원섭, 오상순, 홍두표, 박목월, 최정희, 전숙희 등의 문학가들이 그리움을 안고 진주로 왔다. 이광래(연극), 김해랑(무용), 현일영, 박근신 등은 술 마시는 기분으로 진주행 버스를 탔다. 5회, 6회 대회 때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많은 예술인들이 대회의 권위를 보태기 위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진주를 향해 달려왔다. 출근하는 마음으로 새벼리를 넘어 오곤 했다.

9회부터 11회 대회 심사위원은 대체로 기존의 심사위원이 붙박이로 참여했고 제12회 부터는 외부 심사위원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14회 이후에는 심사위원들의 일부 세대교체가 눈에 띄었다. 문학부의 경우 이형기, 박재삼, 문덕수 등이 참가하여 개천예술제 경연부 출신이 이제 어엿하게 심사석에 앉게 되어 보람을 안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전임 심사위원군이 형성되면서 상당기간 동일한 인사들의 반복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제20회 대회 심사위원진에서 주목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문학부에서 진주문협 회원들의 심사진 수용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진주문협 실무진의 심사위원화를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제21회 대회를 보면 문학에 서정주, 음악에 조상현, 미술에 김은호, 연극에 차범석, 무용에 송범, 사진에 정희섭, 연예에 박시춘, 국악에 황일백 등 심사를 소수 정예 전국단위 대표급 인사를 초빙하는 정예주의를 선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초창기(1회∼11회)는 전 분야 전국 규모 예술인들이 참여했다. 12회 잠시 주춤(5.16)하다가 제20회 까지 그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제20회 이후는 심사진의 점진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으며 본 대회 경연 입상자들이 서서히 심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30회 이후는 심사진이 지역 내지 연고지 인사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외부인사의 경우도 붙박이 심사위원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제45회에 이르러서는 초창기 심사위원들이 노쇠해지는 등 이 때는 거의 면면을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이를테면 매년 그 날 그 시간에 그 여관 그 호실에 붙박이로 오던 심사위원들이 다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이 만들어 내었던 숱한 일화들도 점점 사라져 가게 된 것이다. 시인 구상은 그의 만년에 참가하여 “요즘은 예술의 넉넉함보다 사람들이 기능적으로 변하고 있어 아쉽다”고 말한 바 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디 심사위원들의 면면뿐이 겠냐만 기왕 개천예술제 경연대회 명성을 높인다고 한다면 명망 있고 전국적으로 인지도 높은 인사가 심사위원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박성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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