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어제와 오늘[13]유등축제
개천예술제 어제와 오늘[13]유등축제
  • 박성민
  • 승인 2019.10.0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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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 독립축제 ‘유등’

유등대회 첫해 이름 ‘축하유등대회’
유등 통해 시민 긍지·애향정신 고취
2000년부터 유등축제 분가해 독립
개천예술제 유등대회는 1955년 개최된 제6회로부터 비롯된다.

가장행렬도 탄생은 유등대회와 같다. 유등대회의 첫해 이름은 ‘축하유등대회’로 본 행사가 아닌 외각 행사로 출발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육성축제로 성장한 ‘진주남강유등축제’의 시작은 그것부터 적은 규모였다. 대회 마지막날 오후 7시 남강수변에서 진주시내 중고등학생들이 나와 띄웠다. 이때 유등은 학교별로 단체로 만들어 띄웠는데 진주시 교육위원회 주관으로 진행했다. 1957년 제8회 대회에서는 유등과 꽃불(지금의 불꽃놀이)대회를 진주시 중고등교육회 주관으로 열었는데 유등은 제2야(24일 오후 7시∼9시)에, 꽃불은 그 다음날 제1야(25일 오후 8시)를 수놓았다.

1971년 21회 유등대회는 참가범위가 늘어나 각 학교 학생이 기본이었고 거기에 기관단체가 참여했다. 예술제가 서서히 주민참여가 중요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옳을 것이다. 1972년 22회 대회부터 유등대회는 유등대회부로 승격되고 본 행사 부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28회 대회는 교육감기 쟁탈 유등대회로 개최되었다. 31회부터 고정등 참가 학교가 지정되었다. 진중, 진남중, 대아중, 동명중, 중앙중, 진주기계공고, 대동기계공고, 대아고 진주고, 진주상고 등 10개 학교였다.

개천예술제와 유등대회는 41회부터 민속경연대회에 포함되어 경연이 실시됐다. 민속경연대회 안에는 시군 가장행렬, 교육감기 가장행렬, 농악경연, 민속투우대회, 궁도대회, 그네뛰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대회에서 유등대회의 개최목적을 3가지 밝히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임진계사년에 진주성에서 순사한 조상들의 얼을 추모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함이다.

다음이 경남의 젖줄인 남강을 밝혀 역사 깊고 아름다운 진주 시민의 긍지와 애향정신을 고취함이며 마지막이 각종 전통적인 등과 예술적인 등을 남강 수변에 밝혀 개천예술제 개최를 축하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47회 대회에서는 위의 3가지 의미 외에 진주대첩의 군사작전상의 전술로 쓰였음을 밝히고 있는 데 이를 요약하면 유등은 임란시 군사작전상 군호로 쓰였고(혹은 작전상 적군의 교란용으로), 군사들이 고향에 보내는 소속의 일환이었으며 임란 후 순국 7만 군·관·민에게 드리는 진혼제였고 개최기간동안의 진혼제이며 예술제 개최 축하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천예술제 60년사는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는 49회까지만 동거해 왔고 50회(2000년)대회부터 유등축제는 분가해 나간 것이라고 전한다.

박성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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