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우리는 언제나 역사의 편에 선다
[창간특집] 우리는 언제나 역사의 편에 선다
  • 박도준
  • 승인 2019.10.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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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를 넘어 달려온 경남일보, 항상 도민과 함께할 ‘향토의 횃불’
 
1909년 10월 15일 창간, 1915년 1월 폐간. 1946년 3월 1일 중창간, 1980년 11월 25일 폐간. 1989년 11월 25일 복간.

2019년 10월 15일 창간 110주년를 맞는 경남일보의 역사는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처럼 파란만장했다. 나라가 풍전등화 같았던 시절에 태어나 ‘말뚝활자’와 정간 등의 수모를 당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폐간됐다. 광복 후 다시 중창간되어 박정희 정권도 어쩌지 못한 항일 반공 민족지를 5공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폐간시켰다. 1989년 언론자유화 바람을 타고 다시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최초의 지방지로서 향토의 횃불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경남일보의 110년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창간시기(1909-1915)

◇지방 최초로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

1909년 2월 경남일보주식회사 설립 발기문을 대내외에 공포하고 임시사무소를 설치하면서부터 실질적인 창간 준비활동을 시작한 이래 8개월여 만인 1909년 10월 15일 경상남도청이 있던 진주군 진주면 성내 1동에서 겨레의 이목과 축복 속에 ‘경남일보’가 그 첫 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주식회사, 최초 지방신문, 지방 최초의 근대 활판 인쇄시설을 갖춘 출판 겸 인쇄소인 경남일보는 우리나라 최초 3가지의 기록을 보유하고 출발한 것이다. 축사가 국내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답지한다.

 
 
◇일제에 의해 수난당하는 경남일보

1910년 1월 31일부터 경남일보에 말뚝활자(벽돌신문)가 보이기 시작한다. ‘경남일보 기자가 전국 각 신문사 기자들에게 절하며 고한다’는 제목의 사설 본문 64줄이 말뚝으로 처리되는 것을 시작으로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 의사의 변론부분도 일제의 검열에 의해 말뚝활자로 처리된다. 8월에는 내각대신을 공격한 기사가 치안방해로 압수 처분당한다. 10월11일자 1면 하단에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필4장(絶筆四章)’을 실어 정간 당한다. 황현은 1910년 8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하여 같은 해 9월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경남일보는 이러한 황현의 절명시를 ‘매천선생 절필4장’이라는 제목으로 순국자결의 소식과 유시(遺詩)를 주필 장지연의 평과 함께 게재하여 신문이 압수되고 10일간의 정간처분을 당한다.

 
 
◇1915년 강제폐간 모두가 입을 닫다

일제는 1910년부터 무단헌병통치로 식민통치기반을 다져나가면서 ‘시국(제1차 세계대전)’을 구실로 신문에 대해서도 경무총감령을 공표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온갖 강압책을 자행한다. 주필 장지연을 회유하기도 하였으나 굴하지 않자 일제는 끝내 마각을 드러내고 저들이 말하는 ‘시국’에 부응하여 자진 폐간을 강요한다. 자진 폐간 형식으로 하되 일체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협박과 함께. 실제로 지금까지 폐간 경위나 그 과정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남일보는 1915년 1월 단 한 차례 신문은 찍어내고는 일제 통치를 피해 깊은 잠에 들어간다. 통산 지령 887호였다. 누구도 경남일보 폐간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중창간 시기(1946-1979)

◇반공 반독재 반부패를 사시(社是)로


1946년 3월 1일 경남일보는 항일의 준열한 논지로 말미암아 폐간된 지 32만에 반공 반독재 반부패의 사시(社是)를 기치로 다시 태어났다.

허만채를 비롯한 진주지역 대표적 우익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반공의 기치아래 불사조(不死鳥)의 경일혼(慶日魂)을 다시 이은 것이다.

1946년 허만채를 비롯해 개문사(開文社)를 경영하고 있던 김천수와 실업인 김봉규, 문해술, 김주학, 김석주, 원준옥 김신덕, 강윤영, 이병면 등이 주주로 참여하여 주식회사 경남일보사를 설립했다. 허만채는 중창간을 의해 자신이 경영하던 식품회사를 팔 정도로 열성이었다. 복간이라고 쓰지 않은 뜻은 ‘큰 집을 고칠 때 중수(重修)라고 이르며 다시 세울 때 중건(重建)이라고 하듯이 이런 뜻을 담아 중창간’이라고 했을 정도로 창간의 뜻을 이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경남일보와 개천예술제

1949년 11월 22일 열린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의 전신)는 설창수, 박생광, 이용준, 이경순, 오제봉, 박세제 등 진주의 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예술의 대중화와 독립을 기리고 개천제단에 예술을 봉헌한다는 취지로 개최된다. 설창수는 당시 경남일보 주필이었으며, 박세제는 경남일보 중역진이었다. 개천예술제 주최는 문총 진주지부, 실무는 거의 경남일보 직원들이 맡는다. 주필인 설창수가 모든 일을 총괄했고, 전 사원들이 동원된다. 영화, 총무, 기획, 동원, 접대, 설비, 재무, 연락부의 책임자는 경남일보 직원들로 구성된다. 역대 대회장 중 설창수, 최재호, 박세제, 김윤양 등 경남일보 사장을 역임했으며 실무책임자도 11회까지 기자들이 맡는다. 특히 11회까지 모든 경비를 경남일보에서 제공한다. 설창수가 주축이 되고 경남일보가 총지원했다고 할 수 있다. 개천예술제는 지역 축제의 효시이기도 하다. 개천예술제 취지문 ‘예술은 문화의 또 한 겹 그윽한 꽃이요, 예술이 없는 세기에는 향기와 참다운 인간 정신의 결실이 없는 것이다. …온전한 예술이란 사람의 목숨과 같이 영원히 자유롭고 대중적인 것이다.…’도 설창수가 짓은 글이다.


◇반독재의 길과 신문사의 수난

6.25전란 중 경남일보는 사옥과 시설 일체가 소실되어 신문 발행이 어려워지자 경남지역에서 주인 없는 활자와 인쇄기계를 경찰입회하에 빌려 신문을 제작하거나 직원 친척의 신세도 지는 등 악전고투한다. 이런 와중에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노선은 적극 지지하던 경남일보는 1952년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킨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독재의 길로 들어서는 이승만정권의 정치형태에 과감한 비판을 가한다. 1952년 7월 15일자 社說 ‘民主民性과 大統領- 李博士 下野說의 宜當性’으로 인해 경남일보는 많은 수난을 당한다. 같은 달 26일 하오 11시경에 군복 혹은 평복 입은 십여 명의 일부 무장을 한 듯한 작당 괴한이 돌연 본사 공무국을 포위 습격하고 활자 상자 및 기타 기구 등을 전복하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공무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경남일보는 즉시 7월 28일자로 號外를 발행해 이 같은 만행을 알리고, 반독재 선봉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굳세게 할 것을 다짐한다.

 
 
◇박정희 정권과 설창수 사장 퇴진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경남일보의 역사적 배경을 높이 평가했는지 신문에 대한 통제보다는 사주이며 사장과 주필직을 겸하고 있던 설창수씨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한다. 설창수 사장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평이사로 남게 되자 이사직 사표서를 제출하고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를 수리한다. 설창수 전 사장은 다시 임시주주총회를 열 것을 제의해, 이렇게 열린 총회에서 ‘경남일보를 폐간하고 회사를 해산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아무도 동조하지 않아 묵살된다. 1952년 9월 18일 6대 사장에 취임하여 약 10년간 신문사를 이끌어오던 설창수씨는 5.16으로 말미암아 퇴진을 하게 된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특종보도

1966년 5월 19일자 “密輸品 빼돌려- 稅關선 摘發後 處理흐려” 제목으로 국내 굴지의 삼성 그룹이 사카린을 밀수한 사실을 국내 최초로 보도해, 이 사건이 전국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촉매역할을 한다. 경남일보의 보도로 정치 쟁점화되자 정부는 삼성계 한국비료 중진이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속여 들여와 팔았다고 개인비리로 축소·은폐하려 하자 수사과정과 처리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속적으로 보도한다. 삼성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국내 굴지 대재벌의 밀수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경남일보의 5월 19일자 보도가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우리나라 언론사에 길이 기록될만한 일이다.


◇두 번째 맞는 폐간

신군부의 등장으로 불사조의 혼을 불태우던 경남일보는 다시 날개를 접는다. 반일 반공 반독재를 기치로 내걸고 오직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언론의 사명을 다하려했던 경남일보는 1도1사 원칙을 내세우는 신군부의 개혁을 빙자한 언론 탄압 앞에 펜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11월 18일자 경남일보는 문을 닫게 되었음을 알리는 기사와 사고를 내보낸다. 그리고 11월 25일 1면에 폐간사와 함께 ‘우리의 결의’를 실어 사원들의 뜻을 전한다. 지령 9342호로 폐간된다는 기사는 마지막 인쇄모습의 윤전기와 함께 1면을 채웠다. 폐간사의 제목은 ‘北風寒雪 속 連綿했던 不死鳥의 氣槪’였다. 이렇게 경남일보 71년의 역사는 매듭을 짓는다. 당시 김윤양 사장은 온갖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경남일보 제호는 어느 누구도 쓰지 못하도록 각서를 받으며 훗날을 기약했다.

 

 

 
 

중창간 시기(1989~ )

◇두 번째의 복간


경남일보는 제5공화국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지 만 9년 만에 다시 태어난다. 1989년 1월 복간을 위해 김윤양이 대표이사로 선임된 후 진주시 상평동에 사옥 신축, 사원 공채 등 복간작업을 숨 가쁘게 진행한다. 그러던 중 김윤양 대표이사가 타계하고 김흥치 대표이사가 새로 선임된다. 1989년 11월 26일자 복간호는 유사제호라는 이유 때문에 신경남일보라는 제호로 발행된다. 이후 경남일보 제호를 찾기 위한 노력들이 꾸준히 이어져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마침내 원래 제호인 경남일보를 찾게 된다. 또한 2003년 진주시 수곡면 한 고택의 별장에서 94년만에 창간호가 발견돼 2009년 8월 6일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82호로 지정고시 된다.

박도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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