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규범 사이
윤리와 규범 사이
  • 경남일보
  • 승인 2019.10.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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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진(경상대신문사 편집국장)
얼마 전 서울에 들르면서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친구와 속닥거리면서 지하철을 둘러보는데, 신기한 현상이 눈에 들었다. 내 시야에 노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노약자석이 아닌 일반 좌석에 앉은 나와 내 친구 주변은 온통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이함을 느끼면서 목을 죽 빼고 지하철을 넓게 둘러보자 노약자석에 주르륵 앉아있는 노인들이 보였다. 뭔가 이상했다.

이후 대학 강의를 들으면서 위화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노약자석이란 노인이나 장애인, 임신부 등 약한 사람을 배려하여 마련된 좌석을 뜻한다. 조어 과정에 이미 ‘노인 공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노인 공경’이란 본래 윤리의 영역으로 개인의 양심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느새 ‘노인 공경’이 당연한 규범이 되어버렸다. 이는 곧 강제성과 함께 규범을 지키지 않을 시 도덕적인 잣대가 드리워지기도 한다는 뜻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체인점 CGV가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장애인 좌석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영화 관람석 중 장애인석은 평균 1.76에 불과했으며, 이 또한 영화관 맨 앞자리 구석이나 맨 뒷자리 구석에 위치해있다. CGV는 미국으로 진출하면서도 장애인 전용 좌석을 우리나라와 똑같이 스크린과 가장 가까운 맨 앞자리에 배치했다. 새로운 영화관을 우리나라에 지었다면 법으로 지정된 장애인 좌석 비율을 지켰으니 큰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보통 극장은 장애인 전용 좌석이 영화를 보기 가장 편한 중앙에 있어, CGV가 장애인 좌석에 배려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논란이 되었다.

결국, 지하철의 노약자석이든 영화관의 장애인 좌석이든 규범이 된 윤리를 지키면서 그 최저선만 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법, 규범 같은 상대적으로 물질적인 문화는 발달하는데 사회의 가치관과 의식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문화지체현상으로 인해 약자들은 오히려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된다. 윤리적으로 마땅히 그러해야 할 행동이 규범화됐을 때 문제는 발생한다. 내가 목격한 것처럼 노인들은 지하철 칸 맨 끝, 노약자석이 아닌 곳에는 발을 들이밀지 못하고 장애인은 가장 영화를 관람하기 힘든 장소에만 위치하게 된다.

노인을 공경하고 장애인을 배려해야 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타당한 일이다. 법적으로 약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의 인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규범만으로 굳어진다면, 굳어진 규범을 최소한으로만 따라가려는 태도가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이는 배려를 가장한 소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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