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변 대숲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관리
남강변 대숲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관리
  • 경남일보
  • 승인 2019.10.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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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회원(경남작가회의)
전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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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인 야은 길재는 어려서 포은 정몽주에게 공부하였으며 벼슬은 문하주서를 하다가 고려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모친의 연로함을 핑계 삼아 금오산으로 돌아와 이조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문인 남주헌이 쓴 『야은선생속집』에 의하면 나라가 바뀌고 난 후 처음에 태종은 선생과 한 동네 친구였으므로 동궁에 있을 때 임금에게 간청하여 태상박사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임금은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신하로 대접하지 않고 밭을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 야은은 여기에 전부 대나무를 심게 하였다. 절개의 상징이다. 조선을 섬기지 않으려고 시골로 내려온 야은을 애써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뜻을 적는다는 뜻의 「술지(述志)」라는 시에서는 대숲에서 책을 보는 자신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내 옆 초막에서 홀로 한가롭게 사니/ 달이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넉넉하네/ 바깥 손님 오지 않아 산새들과 이야기하니/ 대숲으로 평상을 옮겨 누워서 책을 보네’

산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예 평상을 대나무숲으로 옮겨 누운 채로 책을 보았다. 야은은 바람이 불 때 대숲에서 나는 맑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야은이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나서 선조시대에 승문원정자를 역임한 이민성은 사당 앞에 야은이 손수 심은 대나무를 벤 관리들을 나무랐다. 그가 쓴 「야은사 앞 대나무(冶隱祠前竹)」에는 이 대나무를 그동안 자손들이 성심으로 아끼고 보호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관청에서 어찌나 모질게 베는지/ 토호들 거들며 못되게 굴었네/ 죽순의 원통함 구할 길 없어/ 끌어안고 목 놓아 울 뿐이라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민성은 그냥 울기만 한 건 아니었다. 먼저 ‘이 고을에도 사대부가 많을텐데/ 어이하여 아무도 말이 없는가’라고 한탄하면서 야은사 앞에 있는 대나무를 베어내는 관리들을 향하여 ‘시를 지어 엄중히 다스렸다.’ 당시에 이런 일은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민성은 영천군수가 향교 사당 앞의 오동나무를 베어 그 나무로 거문고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행동에 대해 도포 입은 선비들이 글을 지어서 꾸짖은 적이 있다면서 자신도 야은사 대나무를 벤 관리들을 나무라는 시를 쓴 것이다.

시를 쓰면서 대나무를 생각한 문인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 명종 때의 송강 정철과 헌종 때의 서녀였던 박죽서는 대나무가 빗속에서 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정철의 시 「비 오는 밤(雨夜)」에는 찬 비에 우는 대숲이 등장한다. ‘밤의 찬 비는 대숲부터 울리고/ 가을 풀벌레 소리는 침상에 가깝나니/ 흐르는 세월을 어찌 붙잡으랴/ 자라나는 백발 막을 길 없네’ 박죽서는 「새벽에 앉아(曉坐)」라는 시에서 ‘먼 하늘 바람에 기러기 떼 울며 날고/ 우수수 댓잎소리 빗소리에 섞여 우네/ 등불은 꺼지려 하고 향불 막 꺼졌는데/ 새벽달은 아직 다락 끝에 걸려 있네’

문인들 뿐만 아니라 음악인들도 대숲에서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한복남이 작곡한 「진주는 천리길」(작사 천봉, 노래 손인호)이라는 노래 가사에는 새들이 대숲을 헤매 돌며 추억에 운다고 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근에 진주 남강변의 대숲 일부를 베어내고 산책로를 만들려는 공무원들이 있었다. 대밭에서 맑은 바람 소리를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다. 지난 4월에 그나마 2m도 없애지 않겠다고 해서 다행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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