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2] 서울시대(1)
남명에게 묻다 [2] 서울시대(1)
  • 임명진
  • 승인 2019.10.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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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의 시대 …벼슬 대신 학문 택한 재야선비
"이곳에 신유년(1501년)에 태어나는 아이는 반드시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남명의 탄생은 조선의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남명학파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6월 26일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토동마을은 인천이씨의 집성촌이다. 국도 33호선을 따라 마을 앞에 있는 남명교를 지나면 뇌룡정, 용암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합천군은 최근 선생의 생가 복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생가는 경남도 기념물 제148호로 지정돼 있다.

주민 이모(84)씨는 “어렸을 적부터 남명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용암서원과 뇌룡전에 이어 몇 달 전부터 선생의 생가 복원사업이 시작돼 다들 관심이 많다”고 반겼다.


◇합천 삼가 외가서 출생

선생의 탄생비화는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다. 풍수지리 등 여러 일화가 전해져 오는데 한 풍수가가 외가집터를 지나면서 “신유년에 태어나는 아이가 장차 성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외가에는 임신 중인 며느리가 있어 외조부가 크게 기대하고 있었으나 마침 출가한 딸이 친정에 돌아와 선생을 먼저 출산하니 외손자의 탄생을 기뻐하면서도 그 복이 조씨 집안에 갔다고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 예언 때문인지 선생이 태어날 시각에는 우물에서 무지갯빛이 뻗쳐 산실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창녕조씨인 선생의 집안은 고려시대까지 9대에 걸쳐 고위관료인 평장사를 배출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가문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았다.

양반가문에서 3대에 걸쳐 큰 벼슬이 나오지 않으면 그 위세가 꺾이기 마련, 선생의 증조부인 조안습은 가문의 중흥을 위해 과거시험을 준비했으나 생원시에 그쳤다.

고심 끝에 훗날을 기약하며 처가가 있는 합천으로 이주했는데, 처가는 고려 말 목화씨를 가져왔던 문익점 가문의 딸이다. 문익점은 고려말 진주목 강선현(오늘의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나 1360년 과거에 급제했다. 공민왕 때 사신단의 일원으로 원나라에 갔다 귀국길에 목화씨를 가져와 1637년 고향인 산청 단성면에 심었다. 목화씨는 보온성이 좋고 재배가 쉬워 겨울을 나기 좋았다. 그 효용성이 널리 알려져 10년여 만에 전국에 널리 퍼져 백성 누구나 무명옷을 입게 됐다. 이를 기념해 단성면 사월리에는 목화시배지전시관이 건립돼 있다.


◇남다른 유년시절

가문 중흥을 위한 오랜 바람은 선생이 태어나면서 이뤄진다. 선생이 4살이 되던 해, 부친 조언형과 숙부인 조언경이 문과에 차례로 급제했다.

부친이 벼슬에 나아가자 선생과 가족들은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하는 행동과 생각이 또래와는 확연히 달랐다.

선생의 나이 8~9세 무렵 큰 병에 걸렸는데 어머니가 크게 걱정하자, 아픔을 억지로 참고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하늘이 저에게 반드시 뜻한 바가 있을 것인데, 제가 어찌 갑자기 요절하겠습니까”라고 안심시켰다.

부친은 선생을 아껴 말을 할 때부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이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고 한다.

나이 15세에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부임하자 따라갔다. 부친의 곁에서 실무행정을 지켜보며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직접 살피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자기수양의 한 방법으로 평소 방울을 옷에 달아 차고 다니며 그 방울소리에 자신을 성찰했다.

후에 선생은 유교경전 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수학, 의학, 제자백가 등 다방면의 학문을 공부하게 되는데, 당시의 경험이 실천학문을 강조한 선생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수양을 하며 학문을 정진했다. 따로 스승을 모셨다는 기록은 없는데 지방관인 부친을 평소 존경했으며 자연스럽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이 18세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지금의 장의동(경복고 주변) 부근서 거주했다. 서울에서 선생의 흔적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한평생 벼슬을 한 적 없는 선생이기에 중앙과는 별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서울에서 청년기를 보내 선생은 많은 이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그중 성운, 성수침은 성상문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자손이다. 이씨 가문의 이윤경·준경 형제와도 교류를 가졌다. 이준경은 후대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남명과 함께 ‘영남삼고’라고 평가받는 송계 신계성, 황강 이희안과도 교류했다

이희안은 사화로 형제가 희생당했고 신계성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신계성과 이준경은 6촌간이며 선생은 이들과 학문토론을 하며 우정을 나눴다.


◇사화의 혼란

백성의 어려운 삶을 목격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선생은 시국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선생의 나이 19세 때, 당시 양반가 자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에서 학문을 정진하다 조광조가 연루된 기묘사화(1519년)를 겪게 된다.

이때 조식의 숙부인 조언경도 연루돼 화를 당했다. 선생은 이때 처음으로 어진 이들이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하는 현실정치의 폐단을 목격하고 크게 슬퍼했다.

한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대장부가 벼슬에 나가 큰 뜻을 펼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종 이후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조선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고려 말부터 세력을 키운 신진사대부는 조선이 개국되자 훈구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그동안 재야로 밀려나 있던 사대부들이 서서히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갈등이 증폭됐다.

연산군과 중종, 인종, 명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훈구파와 신진세력인 사림파간의 격돌이 끊이지 않았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중종 때는 기묘사화(1519), 명종 때는 을사사화(1545)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보복은 또다시 보복을 불렀고, 이는 후에 조선의 붕당 정치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참혹한 사화의 실체를 목격한 선생은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부정과 실망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임금이 숱하게 벼슬을 내렸지만 모두 물리쳤다. 한평생 재야선비로서의 직분을 굳게 지켰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선생은 시대를 보는 신중한 눈을 가지게 됐다. 숙부를 비롯한 가까운 친구들이 죽거나 귀향을 갔는데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남명과 퇴계

퇴계 이황은 조선의 성리학이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퇴계와 남명은 당시 조선 유학을 주름잡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퇴계의 근거지인 경상좌도와, 남명의 근거지 경상우도를 빗대,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렸다.

경상좌도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 경북이고, 경상우도는 서울서 왕이 내려다 보았을 때 낙동강에 우측에 있는 지역을 지칭한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 경남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공교롭게도 남명과 퇴계는 1501년 동시대에 태어났다. 생애를 마친 시기도 비슷했다. 이들의 제자들은 나중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형성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실인식, 외교정책, 학문적 방향 등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달랐다. 같은 유학자이지만 두 사람의 학문과 사상이 그만큼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실제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여러 차례 편지로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다.

실천유학을 강조하면서 폭넓은 타 학문을 적극 수용한 남명과는 달리 퇴계는 정통 성리학의 이론적 확립에 심혈을 기울이며 ‘동방의 주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를 두고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경상좌도는 인을 주로 하고, 경상우도는 의를 주로 한다”는 말로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토동마을 입구에 있는 남명교.
남명 조식 선생의 외가인 토동마을 입구에 있는 남명교.
남명 조식선생의 생가는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 입구. 현재 복원사업이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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