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길[1] 총괄-남명에게 묻다
남명의 길[1] 총괄-남명에게 묻다
  • 임명진
  • 승인 2019.10.15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껍데기는 가라…나는 知行合一 지식인이다”

탁류를 거스르는 실천유학 재야선비의 큰 봉우리
스스로 경계하며 의로움을 찾는 삶 자체가 교훈
위선·거짓 득세하는 세태 내리치는 시퍼른 칼날

<글 싣는 순서>
1. 총괄-남명에게 묻다

2. 서울시대
-1)성현의 탄생
-2)스스로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다
3. 김해시대
-1)산해정을 짓고
-2)시련 속에 핀 의지
4. 합천시대
-1)세상을 향한 분노
-2)조선을 놀라게 한 단성현감사직소
-3)삼고초려, 거듭된 출사를 거절하다
5. 산청시대
-1)말년에 지리산에 정착하다
-2)날카로운 현실인식, 서리망국론
-3)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
6. 전문가 인터뷰
 
왜 남명인가. 왜 우리는 수백년전 인물인 그에게 답을 찾고자하는가. 이 질문은 경남의 정체성과 뿌리에 잇닿아 있다. 혁신과 갈등에 몸부림치는 경남의 현재는 과거와의 연속성에서 비로소 의미가 재생산된다. 그래서 초야에 묻혔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신념과 이상을 추구한 그에게 길을 묻고 시대정신을 갈구한다. 남명의 선비정신을 재조명하는 것은 선연한 역사의 뿌리찾기이며, 미래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이다. 창간 110주년을 맞은 경남일보는 시퍼런 칼끝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낸 남명의 발자취를 되짚어며 남명 로드(road), 그 사상적 여정을 순례한다. /편집자 주

‘조식은 도량이 청고(淸高)하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뇌풍(雷風)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利慾)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자들이 남명(南溟)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조선왕조실록 선조 5년

조선 선비를 대표하는 실천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 왕조시대에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본사상을 강조한 그는 경남이 배출한 걸출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명 조식(이하 남명)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우니 왕이 직접 자신의 전의를 보내 치료케 하고, 흉년이 들자 쌀을 보내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남명이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이 크게 슬퍼했으며 후에 사간원 대사간에 봉했다.

남명은 평생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다. 그런 선비를 재야선비, 산림처사라고 부른다. 재야선비인 남명이 어떤 연유로 왕조실록에 수백 회에 걸쳐 기록이 남겨져 있고 이토록 칭송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명은 조선 중엽에 태어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와 합천, 산청, 김해 등지에서 활동하며 경상우도(경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가 살다간 시기는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 밖으로는 왜구의 침탈이 더해져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 졌다.

그는 여는 선비들과는 달랐다. 특이하게도 칼과 방울을 차고 다녔는데,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라고 새기고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했다.

여기서 ‘경’은 내적 수양, ‘의’는 외적 실천과 관련시켰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고, 밝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는 뜻이다.

‘성성자’라는 방울은 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태해지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깨우치게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의 사상과 학문에는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천유학을 중시하며 당시에는 금기시된 다양한 학문을 포용했다.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그때마다 모두 물리쳤다.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정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에 투신,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영남 3대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 김면을 비롯한 의병장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후대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남명 스스로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데다,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중앙무대에서 몰락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명학파의 본산지인 경남은 한국선비문화연구원,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등의 여러 기관에서 남명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불의에 항거하는 경남인의 정신을 남명의 ‘경의 사상’에서 찾는 연구부터 시작해 다양한 학문적 토론과 오늘날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남명이 재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과 백성을 위한 애민사상, 다양한 사상을 포용한 실천유학은 커다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남명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명의 생애는 크게 합천에서 출생해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청소년기), 김해에 산해정을 짓고 산 시기(중년기), 합천에 계부당과 뇌룡사를 짓고 산 시기(장년기), 말년에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산 시기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