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4] 김해시대(1)
남명에게 묻다 [4] 김해시대(1)
  • 임명진 기자
  • 승인 2019.10.29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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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략을 꿰뚫어 본 남명
병법 가르치며 대비 의병 활약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유비무환 메시지 던져
김해서 산해정 짓고 남명학파 형성
첫 제자, 첫 벼슬 받으면 명성 떨쳐
신산서원


‘그대들에게 견해를 묻노라. 섬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 풀어주고 길러주는 은혜는 날로 더해가거늘 멋대로 날뛰어 비할 수 없는 재난을 일으킨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왜적에게 예물을 내리라고 명령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왜적의 사신이라면 목을 베어야지 사신 대접까지 해줄 이유가 있겠는가? 제압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어 평화롭게 회유되지 않으니 그 침입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제군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남명집 中 남명이 69세의 나이에 제자들에게 남긴 글



남명이 살았던 시대는 나라 안팎으로 큰 혼란에 처해 있었다.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부터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종대왕은 대마도 정벌과 4군 6진을 개척하며 국토를 넓히는 성과를 거뒀다.

성종대왕 시절까지 안정된 국정을 바탕으로 큰 외침은 없었지만 이후 연산군과 중종, 명종에 이르러서는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왜변 등 왜구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 왜구들은 1555년 을묘년에는 대규모로 떼를 지어 전남 해안가에 상륙해 일대를 마구 노략질했다.

조선은 부랴부랴 중앙군을 내려 보내 왜구를 간신히 토벌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남명이 1555년 왕에게 올린 단성현감사직소를 보면 국방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노략질 왜적 목 베어야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 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병사가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왜놈들이 몰래 결탁해 앞장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한술 더 뜨십니다.

세종대왕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해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단성현감사직소의 내용 중 일부

 

남명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왜적들을 달래기만 하는 허약한 조정의 무능함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오늘의 위기는 평소 국방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니 초래된 것일 뿐 세종대왕 때처럼 국방에 신경을 썼더라면 이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실제 제자들에게도 병법과 궁마 등을 가르치며 문무를 겸비케 했다. 이 같은 현실인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유비무환’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남명이 국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김해로 이주하면서다. 김해는 남명이 30세부터 학문을 닦고 처음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곳이다.

본래 처가가 있던 곳인데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주했다. 당시 김해는 부산과 인접해 주변 바다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여기에 강학장소로 산해정(山海亭·경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을 짓고 18년 동안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남명은 병법도 가르치며 국방에도 힘써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영남 3대 의병장인 곽재우, 정인홍, 김면을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 남명의 제자 50여 명이 대거 의병을 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유명하지만 남명은 그에 앞서 왜구의 계속되는 침탈이 심상치 않다고 여겨 대비를 한 것이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으로 큰 활약을 펼치면서 중앙정부에 대거 진출해 남명학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면서 “남명은 수많은 인재를 길렀는데 이만규가 조선교육사에서 우리나라 교육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산해정

◇산해정을 짓고

남명이 32세가 되던 해,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니 선비들 사이에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산해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거주하는 방은 ‘계명실’이라고 했으니 옛날 성현들의 밝은 덕을 계승해 사방에 펼친다는 뜻이다.

산해정 완공을 축하하는 낙성식에는 전국에서 명망 높은 젊은 선비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대곡 성운, 청향당 이원, 송계 신계성, 황강 이희안 등이 내방해 학문을 강론했다. 남명은 신계성, 이희안과 함께 ‘영남삼고(嶺南三高)’로 불리게 된다. 이를 두고 화담 서경덕이 ‘하늘의 덕성들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남명의 명성은 더욱 알려졌다.

조선시대는 조정에서 만든 ‘조보’라는 소식지가 있는데, 남명은 벗들의 도움으로 김해에서도 최신 서적과 조보를 받아볼 수 있었다.

어릴 적 벗인 이준경은 수시로 책과 조정에서 간행하는 달력 등을 보내주었다. 이준경은 나중에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다.

33세가 되던 해 다시 과거 향시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했다. 벼슬에 나아갈 것을 바라는 모친과 집안의 기대를 차마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해인 1534년 2차 시험 격인 회시에 응시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선생은 과거에 별 뜻이 없었기에 낙방에도 개의치 않았다.

남명의 과거시험은 그의 나이 36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남명의 깊은 뜻을 헤아린 모친이 남명의 간청을 받아들여 허락한 것이다.


◇제자를 가르치다

김해에서 남명은 ‘산해선생’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제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암 정지린이 먼저 찾아 배움을 청하니 남명이 제자를 가르친 것은 이때부터다.

남명학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옛날에는 배우러 오면 물리치지 않았다. 가르친다고 해도 수업료를 요구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배우는 사람들이 성의로 음식이나 지필묵 등을 알아서 들고 갔다. 그것도 필요이상이면 야단을 쳐서 돌려보냈다. 그러니 돈 받고 가르치는 예는 거의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남긴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고 서원이나 사당, 비석을 세워 그 학문을 찬양했다. 한번 제자가 되면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38세가 되던 1538년, 그의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종9품 관직인 헌릉 참봉 벼슬이 내려졌다. 남명을 벼슬에 추천한 이는 회재 이언적과 남명의 벗인 이림이다.

당시 조정은 ‘유일등용책’이라는 인사정책을 펴고 있었다. 여러 사화로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리를 채우기 위해 재야에 은거하고 있는 선비들을 등용하고자 했다. ‘유일’이란 재야에 은거한 선비를 지칭한다.

남명은 이미 정치에 실망해 재야선비로 살겠다는 뜻을 굳힌 터라 벼슬을 거절했다. 태종의 능인 헌릉을 관리하는 관직은 애당초 남명과는 맞지 않았다. 비록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그 학문과 명성이 조정에 알려질 정도로 성취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단 큰들 진은주 기획실장

남명을 알리는 사람들(1) 극단 큰들 진은주 기획실장

“남명사상 알리는 계기돼 뿌듯”

극단 ‘큰들’은 1984년 진주시 상평동에서 출범한 지역극단이다. 옛날에는 도동을 큰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름도 거기에서 따왔다.

올해로 35년차를 맞는 중견극단으로 35명의 상근단원이 활동하고 있으며 해외공연까지 연간 100회 정도 공연을 한다.

우리 지역의 소재를 가지고 마당극을 많이 만들어 지역특화형 무대를 많이 만들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마당극 ‘남명’을 무대에 올려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진은주 기획실장은 “작년 산청선비문화축제에서 첫 공연을 시작으로 올해 선비문화축제까지 딱 20회를 채웠다. 공연은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저기서 초청공연을 원하는 곳이 많다”고 말했다.

남명을 무대에 올린 배경에 대해서는 “사실 저희도 선생을 잘 몰랐는데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많은 분들에게 알려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선생에 대해 알수록 정말 놀라웠다. 우리 지역에 이런 대학자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마당극은 익살스럽고 해학적인데, 이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고심이 많았다고 했다. 진 기획실장은 “부담도 됐다. 마당극 특유의 장점을 살리고 남명사상을 쉽고 재미나게 표현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마당극은 남명을 잘 몰랐던 일반 대중들에게 공연을 통해 자연스레 소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진 기획실장은 “한 무대에 30여 명의 단원이 올라 남명의 경의 사상과 실천사상을 공연하고 있다. 정말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뿌듯하다. 특히 공무원분들이 공직사회에 큰 울림이 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고 했다.

마당극 남명은 올해 예정된 공연이 모두 끝났다. 하지만 초청공연을 원하는 곳이 많아 현재 추가 공연일정을 조율중이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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