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바다
[강재남의 포엠산책] 바다
  • 경남일보
  • 승인 2019.11.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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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박문희)
 
수많은 이가 다녀갔지
붉은 심장 하얀 손으로 보듬으며

기억하고 싶은 날에도
사르고 싶은 날에도
소주잔 기울이다가 전봇대에 기대다가
말없는 네게
나는 마른 얼굴로 서 있었지

그저 밀려왔다 밀려가는 너를 본다

그때도 지금도 네 앞에 선 것은
주절주절 꺼내놓는 이야기가 끝일 것 같아서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이 찰나일 것 같아서

조등으로 걸린 낮달
헐거운 인연이 하얗게 뿌리를 드러낸다

떨리는 어깨를 바람이 쓸어안는다
바람 맞으며 나는
즐거운 이별을 꿈꾸어야겠다
아득한 수평선에 마침표 찍고
나는 그대로 섬이나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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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 터를 두고 살았다. 그럼에도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또래들이 멱을 감는 동안 햇볕에 익은 너럭바위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날이 길었다. 내게 있어 바다는 품을 내어주기보다 절망을 안겨주는 대상이었다. 붉은 산이 그림자를 벗는 저녁이면 잠시 절망을 접기도 하였지만 뱃길이 열리는 시간에 갈매기가 횡으로 난다거나 공기의 습한 냄새에서 비가 묻어온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채는 것이 바다를 근접해 사는 사람의 특성이라는 것에 몸서리치면서 절망의 시간을 건넜다. 갯냄새에 숨 막혀 죽을 것 같던 어느 해 산골로 숨어들었다. 숲이 뿜는 솔향에 의지한 채 몇 달을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누구인지 존재확인이 되지 않았다. 바다는 결국 내 모태의 바탕이며 실존의 터전이었다는 걸 깨닫고서야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와 다른 경험으로 바다에 선 시인을 만난다. 무채색의 담백하고 순수한「바다」를 그리는 시인은 성정도 이러하리. 감정과 감정이 의존하며 서로를 제약하고 그러면서 수용한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바다의 뼈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사람에게 너른 품을 내어주고 사람은 바다에게 속내를 보여주는, 그 관계가 거룩하고 숭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일으켜 세운다. 붉은 심장과 하얀 파도가 서로를 보듬으며 위로하는 너와 나, 내가 문득 네 앞에 멍하니 있어도 속사정을 묻지 않는다. 그저 왔다갔다 나를 토닥인다. 그 앞에 서서 이별을 보태도 좋을 여백을 만나고 마침내 슬픔이 즐거움으로 치환되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 떨리는 내 어깨를 치는 건 바람이 아니다. 바다가 불러주는 노래를 알아듣고 흔들리는 것이다. “아득한 수평선에 마침표 찍고” 그대로 섬이 되고자 하는 시인의 결이 순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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