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6] 합천시대(1)
남명에게 묻다 [6] 합천시대(1)
  • 임명진
  • 승인 2019.11.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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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분노

‘조식은 천성이 강개하고 정직하여 세상 따라 부앙하려 하지 않았고, 몸을 깨끗하게 가져 속된 사람과 말할 때는 자신을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뜻이 있었으며 국가에서 누차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조선왕조실록 명종 8년

남명이 김해에서 오랜 생활을 청산하고 1548년 고향인 합천 삼가의 토동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의 명성은 온 나라에 알려져 각종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한사코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을사사화(1545년)의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면서 왕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는 또다시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는 이들을 대거 숙청하는 사건을 계획했다. 벽서의 내용은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윤원형 일파의 간사한 무리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나라가 머잖아 망할 것이다’는 것이다.

이에 문정왕후가 분노하니 조선전역이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사건에 또다시 남명의 벗들이 희생당했다. 벗 송인수가 목숨을 잃었고 남명을 처음으로 관직에 추천한 회재 이언적과 지인들이 줄줄이 연루돼 귀양을 갔다. 연이은 사화와 일련의 사건들은 남명에게 큰 충격을 줬다.

어지러운 세상을 향한 남명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데 바로 그 유명한 단성현감사직상소(1555년)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왕을 직접 비판한 상소를 올린 이는 남명이 처음이다.

◇계부당·뇌룡사를 짓다

고향에 돌아온 남명은 이 시기에 경남우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 천거했지만 나가지 않았고 뒤에 회재가 경상도관찰사로 왔을 때 보기를 청했지만 또한 사양했다.

그러다 명종 3년(1548년)에는 특명으로 벼슬을 높여 두 번이나 주부를 제수하고 1553년에는 퇴계 이황이 출사를 권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끝내 나가지 않았다. 퇴계는 남명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퇴계집에는 남명에게 보낸 세 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남명의 뜻이 곧 성(成), 이(李) 두 사람의 뜻이라, 이제 두 사람 모두 벼슬하러 나왔으니 조남명도 나오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그대는 끝내 (벼슬에)나오지 않으니 어째서입니까? 벼슬할 때가 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신다면 임금님께서 훌륭하셔서 어진 인재를 목 타게 기다리시니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중략)’-퇴계집

남명은 벼슬 보다는 후학양성에 더 뜻을 두었다. 그가 지은 계부당과 뇌룡사의 명칭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당시의 조정은 외척들의 농간에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여러 사화로 인해 올곧은 선비들의 씨가 말랐고, 매관매직이 판을 쳐 조정에는 간신배들이 들끓었다.

남명은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비들을 더 많이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에 제자들을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배우기를 원하는 제자들도 갈수록 늘었다. 오건이 찾아왔고 정인홍이 유생들을 이끌고 제자가 되었으며 김우옹·최영경 등 뛰어난 젊은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을 가르칠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계부당은 살림집이고, 뇌룡사는 강학을 하는 학당이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듯이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남명은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는데, 그중 노장적 요소가 엿보이는 것이 바로 계부당이다.

뇌룡사는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다.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가만히 있다 때가 되면 뇌성이 친다는 말로 이는 곧 꾸준히 준비해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김해에서의 생활은 남명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모친과 아들, 그리고 벗들을 차례로 잃었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드러내던 시기였다”면 “합천에서 남명은 완전한 학문적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한편으로는 안으로 응축한 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계부당과 뇌룡사라는 이름에서 남명의 개방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이단시 되던 노장적 요소를 가미한 이들 이름은 정통 주자학을 표방하던 일부 성리학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남명이 오늘날 다시 조명 받는 이유도 바로 이런 포용성과 개방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소장은 “남명은 마음의 수양이라는 측면에서 노장과 장자, 또는 다른 사상이더라도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좋다고 여겨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점에서 퇴계와 남명이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퇴계와 남명은 성리학자이지만, 남명이 성리학을 기본으로 다른 사상에 개방적인 측면을 보였다면 퇴계는 유교 가운데서도 주자성리학을 강조했다.


◇욕천, 냇물에 목욕하며

남명은 제자들의 교육에도 독특한 면모를 보였다.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깨우쳐 공부하도록 이끌었는데 성급히 성취를 욕심내거나 학문 자체보다는 벼슬에 뜻이 두는 이들이 있으며 크게 꾸짖었다. 평소 성현의 글 중에서 눈여겨보는 구절은 따로 기록해 두었는데 후대에 이를 ‘학기유편’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남명이 뇌룡사에서 제자양성에 몰두하고 있을 때 조정은 그에게 종 6품직의 전생서 주부직의 벼슬을 내렸다. 당시 천거로 등용하는 인재에게 6품의 관직은 파격적이었지만 남명은 나아가지 않았다. 남명이 벼슬을 포기한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당시 정권을 잡은 윤원형 일파는 여러 사화와 사건으로 많은 선비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 민심이 크게 흔들렸는데 초야에 은거한 선비들을 등용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면서 “남명 선생은 이 같은 속셈을 알아채고 일체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시기 남명이 남긴 시를 통해 당시 어지러웠던 세상을 바라보는 남명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간악한 무리들이 들 끊는 세상 속에 선비로서의 자신의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지켜가려는 남명의 강렬한 의지가 글자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욕천(냇물에 목욕하며)

사십 평생 쌓여온 이내 몸 더러움을
맑은 몸 깊고 넓어 남김없이 씻어냈네
오장 속에 티끌 혹시라도 남았다면
당장 이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남명 선생의 남아있는 흔적

오늘날 남명의 유묵과 유품은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다. 남명이 세상을 타계하고 20년 만에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 거의 모두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임란때 남명의 제자 50여 명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왜군의 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남명의 기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문중에서 불천위제사를 드리는 별묘(여재실)로 들어가는 종택 입구에 면사무소를 설치해 그 기운을 꺾고자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남명의 유묵으로 알려진 것은 5편의 글이 있는데, 지금까지 남명의 친필로 인정되고 있다.

이중 사성현 유상 병풍으로 불리는 작은 병풍은 선생이 직접 그린 공자 주렴계 정명도 주자 등의 흉상인데 2016년도에 진주박물관에서 이 그림에서 새로 입힌 종이와 덧칠을 제거하고 원래의 모습에 가까운 상태로 복원했다. 신명사도도 감정 결과 조선중기의 재질이 확인돼 진주박물관에서 사성현 유상 병풍과 같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선생의 문집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됐다. 여기에 수록한 문집과 목판은 남명기념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산청 세심정에 있는 욕천이라는 시가 새겨진 바위.


 
현존 최고본인 갑진본(1604년)계열의 남명집. 자료제공=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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