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시화
서른 번째 시화
  • 경남일보
  • 승인 2019.11.1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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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시인·진주문협 상임이사)
이미화 이사
이미화 이사

뜻밖에, 아는 선배한테서 소국 한 묶음을 선물 받았다. 가을이 무르익어 온 꽃이라 사무실에 두고 볼까 하여 신문지 다발을 풀었더니 목이 마른지 지쳐 있다. 꽃보다 봉오리가 많아 마음이 더 아리다. 고운 병을 찾아 꽂아 주며 참 예쁘다 말해주고 따뜻하게 쓰다듬어 준다.

국화는 땅이 기름지지 않아도 뿌리를 잘 내려 가을이면 길옆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산과 들에 단풍이 들고 무서리가 내려도 늦가을까지 향기로 남아 움츠린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꽃묶음을 보고 있으려니 개천예술제 시화전 앞에서 환하게 웃던 모녀가 생각난다. 활짝 피었던 꽃과 아직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가는 봉오리 같은 두 모녀가 시화 앞에 서서 시를 읽는다. 글자보다 그림에 더 반응을 보이는 딸은 지적발달장애인인 듯했다.

얼핏 외모로 보아 마흔 안팎은 되었지 싶은데 글자를 깨우치고 있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다 국화처럼 노랗게 미소를 머금는다. 나는 그녀가 시에 있는 낱말을 읽고 되돌아와 그 다음 낱말로 넘어가려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을 달싹거리게 되고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사람들이 시화 앞에 잠깐 섰다가 눈으로 쓱 읽고는 지나간다. 한 편을 읽고 새기기에도 모자라는 시간 같은데 다 봤다는 듯 다른 볼거리를 향해 바삐 떠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국화처럼 뿌리내린 자세로 한 편의 시화 앞에서 온몸으로 글을 읽어가는 진지한 딸과 그윽한 미소로 바라보는 어머니는 한 편의 시화 같다. 우리 회원들이 낸 스물아홉 편에서 서른 번째의 아름답고 맑은 시화여서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애틋했다.

남강에 띄워놓은 유등들이 한꺼번에 불을 켜며 저녁 강기슭이 찬란하게 깨어난다. 하루 종일 시화전 둘레를 관리하며 다녀간 사람들을 정리해 본다. 지인의 작품을 보러왔다며 시화 앞에서 단체로 사진 찍는 사람들. 시를 외우기 좋아해서 해마다 시화전은 꼭 보러 온다는 노신사. 그리고 굵은 꽃그림이 그려진 작품 앞에서 글자를 읽어내느라 눈길을 모은 채 떠날 줄 모르는 모녀. 이런 분들이 있어서 해마다 시화전을 준비하는 보람을 느낀다.

내일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탁자 위에 두고 온 국화 꽃병에 물도 갈아주고 따뜻한 인사도 건네야겠다. 봉오리들이 꽃으로 활짝 피어 반갑게 맞아주겠지. 국화 옆에서 달큰한 향이 나는 커피 잔을 놓고 서른 번째 시화였던 두 모녀의 아침이 꽃처럼 오래도록 향기롭길 바래보련다.

 
이미화(시인·진주문협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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