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길[7] 합천시대(2)조선을 놀라게 한 단성현감사직소
남명의 길[7] 합천시대(2)조선을 놀라게 한 단성현감사직소
  • 임명진
  • 승인 2019.11.19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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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임금을 분노케 한 한통의 상소
왕이라도 잘못하면 직언 서슴치 않아
‘내가 학식(學識)이 밝지 못해 비록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공부는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말들은 오히려 가납(嘉納)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손치 못한 말이 자전(문정왕후)에게 관계되는 것은 매우 통분스럽다. 군상(君上)을 공경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싶으나 일사(逸士·재야선비)라고 하므로 내버려 두고 묻지 않겠다. 이조(吏曹)로 하여금 속히 개차(改差)하도록 하라.’-조선왕조실록 명종편

조선 명종 즉위 10년(1555년), 조선왕조실록은 명종이 한 통에 상소에 크게 분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향 합천의 삼가로 이주해 후학들의 양성에 전념하던 남명에게 조정은 이번에는 중앙의 벼슬이 아닌 지방 관리직을 제수했다.

삼가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단성(현 산청)의 현감직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남명은 또다시 벼슬을 사직하며 대신 한 통의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이 상소가 바로 그 유명한 ‘단성현감사직상소’이다. 을묘년에 올렸다고 해 을묘사직소라고도 한다.

상소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직을 알리는 상소에서 왕의 국정 전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남명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이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외직의 신하들은 백성들을 갉아먹기를 마치 늑대가 들판에서 날뛰는 듯 하고 있습니다’-단성현감사직소

더욱 놀라운 것은 왕인 명종을 어린 고아로 묘사하고, 외척을 등용해 수렴청정을 했던 어머니인 문정왕후까지 국정혼란의 책임을 물어 강도 높게 비난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종은 22세의 어엿한 청년이었지만 무기력한 군주였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을 거두기까지 8년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을 거둔 뒤에도 여전히 문정왕후와 외척의 간섭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명종 시대는 즉위기간은 22년으로 길었지만 왕권은 극히 미약했다고 할 수 있다.

‘자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단성현감사직소

여태껏 어느 누구도 왕을 직접 지목해 비판의 상소를 올린 예는 없었다. 조식은 달랐다. 충과 효가 강조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과격한 표현이 상소에 적나라하게 나열돼 있었다.

왕과 어머니, 대비까지 과부라고 비난했으니 갓 스물을 넘긴 명종은 매우 통분스럽다는 말로 심경을 밝혔다.

상소의 내용이 오늘날 읽어도 놀라울 정도이니, 당시 이 상소가 얼마나 조선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외척들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돈으로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돈으로 관리에 임명된 이들은 다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여기에다 왜적이 수시로 해안가를 침범하니 나라 전체가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백성들은 기댈 곳이 없었고 누구 하나 백성의 삶을 살펴야 된다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 남명은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며 왕과 조정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 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 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중략)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 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단성현감사직소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만약 명종이 남명의 목숨을 건 충언을 받아들여 정치개혁의 시발점으로 삼았다면 현명한 임금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명종은 남명을 처벌할 궁리만을 했다”고 말했다.

‘이조에 명해 그를 빨리 단성현감직에서 파면토록 하라. 내가 덕이 없는 임금인 줄을 스스로 모르고서 위대한 어진 분에게 조막만한 고을을 다스리라고 했으니 그를 욕되게 한 것이구나. 이는 내가 영민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승정원에서는 그렇게 알지어다’-조선왕조실록 명종편

명종은 남명의 상소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남명을 ‘위대한 어진 분’이라고 묘사하며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하지만 조정 안팎에서 남명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편에는 당시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강관 정종영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들은 그 소를 보지 못해 그 말이 어떤가를 모르겠으나 참으로 대비께 모욕적인 언사가 있었다면 죄를 다스려도 될 것입니다. 다만 조식은 초야에 은거한 선비로 성품이 거칠고 소탈해 예를 차릴 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은 초야에 물러나 숨어 사는 선비와 갑옷을 입은 무사는 특이하게 대우했습니다. 거친 태도를 책망하지 아니하고 욕심 없이 물려나려는 뜻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하셔야 옛날의 제왕이 선비를 높인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바깥의 사람들은 소의 내용이 공손치 못한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전하께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옛날의 제왕과 같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비의 기개가 꺾여집니다’

사간원 정언(정6품) 이헌국도 남명을 옹호했다.

 
‘전하께서, 조식이 올린 소의 대비께서 생각이 깊으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공손치 못한 말이라고 여기시는데, 옛날 구양수(歐陽修)가 황태후를 한 사람의 부인(婦人)이라고 하였지만 태후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식은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 주상이 위에서 고립되어 백성의 실정을 들을 수 없을까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벼슬을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쓴 것인데, 이것은 전하를 업신여긴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말에 대해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하신다면 그것도 국가의 복입니다.

조정에 가득한 신하로서 누가 국가의 은혜를 입지 않았겠습니까? 국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국가의 은혜 속에서 죽는데도 오히려 기꺼이 말을 다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식은 초야의 일개 선비로서 비록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각오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데, 전교에 그 공손치 못한 죄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여러 신하들의 간곡한 간언을 받아들여 명종도 결국 남명을 처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록에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명을 내리는 명종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고르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내가 계교와 사려가 얕고 학식이 본래 없기 때문에 사리(事理)를 모른다. 그러나 군신 상하의 분수는 신자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유일(遺逸)의 선비라 하더라도 그 의리를 알지 못할 것 같으면 어찌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이 공손하지 못한 데에 관계된다면 신자가 마땅히 처벌을 주청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정에서도 군상을 공경하지 않는 조짐이 싹틀 것이다. 만약 그 소(疏)의 내용을 옳다고 한다면 이것도 올바르지 못한 의논이다. 그러나 조식을 일사(逸士)로 여기기 때문에 너그러이 용납하고 죄를 다스리지는 않는다.”-조선왕조실록 명종편



상소의 여파는 컸다. 이듬해인 명종 11년, 1556년 성균관 생원 안사준 등 500여 명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내용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다.

‘신들이 조식의 상소를 보건대, 강직하고도 절실한 의론(議論)으로 정녕 나라를 걱정한 성심에서 나온 것이요, 잘못된 폐단에 적중한 말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살펴 받아들여 행하셨다면 지금의 변고를 없애는 방법이 반드시 여기에서부터 근본이 되었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단호히 그의 말을 거절하여 남의 말을 꺼리는 빛을 크게 보이셨으므로, 인심이 감복하지 않고 언로가 막히어 사림(士林)의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명종편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남명의 상소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더라면 명종의 입지가 보다 탄탄해졌을 것이며,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언로가 막히고 선비들의 기대가 무너졌다고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남명이 올린 한 통의 상소는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남명은 왕의 분노를 사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직언을 서슴치 않는 선비의 표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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