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감나무
빈 감나무
  • 경남일보
  • 승인 2019.11.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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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시인·진주문협 상임이사)
손에 든 종이 상자 한 번 쳐다보고 감나무 한 번 쳐다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보름 전에 덜 익은 대봉감은 그대로 두고 갔었는데, 감은 온데간데없고 빈 나뭇가지만 멋쩍게 서 있다.

이웃들이 주말 농장 이야기를 하며 흙을 가까이 하고 사는 게 부러워 나도 몇 년 전 시내와 멀리 떨어진 언덕배기에 조그만 밭을 마련하였다. 첫해에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감나무와 오디나무, 아로니아 두세 그루씩 심어놓고 가꾸는 재미에 흐뭇해했다. 얼치기 농사꾼이지만 가끔 풀도 뽑아주고 흙을 북돋아 뿌리가 튼실하게 뻗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가지를 바르게 잡아준다거나 순자르기를 하지 않아도 방긋방긋 꽃이 피었다 지더니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열매가 익으면서 거두어들이는 때를 자꾸 놓치게 되었다. 오디가 시장에 나온 걸 보고 왔을 땐 벌써 굵직한 것은 다 떨어지고 마지막 이삭만 주웠다. 아로니아는 열흘쯤 늦었더니 한 알도 딸 수 없었다. 빈 나뭇가지를 보며 함께 간 친구와 어이없는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마침 지나가던 안골 할머니가 새들이 새카맣게 앉아 다 따먹고 가더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로니아만 따 먹는 새가 따로 있다고 하면서 이 산마을에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던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신다.

지난번 오디는 중력 때문이고 이번엔 새들의 짓이라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저쪽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에 눈길이 머물다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어미 새 몇 마리가 아기 새와 가족들의 먹이를 구하러 이리 날고 저리 날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밭에서 맛 나는 열매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을까. 얼른 무리로 돌아가 가족들을 불러 모아 마음 놓고 따먹으라고 바쁘게 날갯짓을 했겠구나. 배가 허출한 저녁 무렵이었으면 새들은 만찬의 기쁨을 누렸겠다.

해가 지고 어둑할 무렵 친구와 나는 상자는 접어두고 빈 봉지를 팔랑거리며 돌아오는데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달이 하얗게 웃는다. 달의 어금니가 깊숙이 보이고 목젖이 드러나 친구도 나도 함께 소리 내어 따라 웃었다. 우리에겐 대봉감이 가져다 줄 가을이 남아 있어 웃을 수 있었다.

지난여름 마음 좋게 웃으며 돌아갔다는 걸 기억하는지 감나무가 서운해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새든 감나무가 없는 누군가든 다 임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말을 하려는 듯 바람에 잎사귀를 자꾸 달싹거린다. 나는 사라진 감들이 어느 뉘 집 자배기에서 빨갛고 찰진 홍시가 되어가길 기도하련다.
 
/이미화(시인·진주문협 상임이사)
이미화 이사
이미화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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