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뒤에 보이는 작은 거인, 내고 박생광
떠난 뒤에 보이는 작은 거인, 내고 박생광
  • 경남일보
  • 승인 2019.11.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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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임식 한국토지주택공사 지역상생협력단장
“머무를 때는 보이지 않고 떠난 뒤에야 보이네.” 가수 조용필이 직접 작곡하고 노래한 1985년곡 ‘눈물로 보이는 그대’ 일부다.

작사가 양인자는 함경북도 나진에서 태어나 부산여고를 나온 소설가·극작가이다. 남편 김희갑의 작곡으로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명곡을 남겼다. 노래 가사처럼 진주에 있을 때나 젊었을 때 전문가와 고향 주민들에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떠난 뒤에 크게 보이는 화가가 바로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1904~1985)이다. 진주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술을 벗 삼아 예술활동을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해 내지 못한, 전통을 바탕으로 오늘의 새로운 창조를 해 낸 유일한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2004, 홍윤식). 고고학자 김원룡은 ‘내고의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과 감동을 받았다. 조선의 단청불화, 민화의 원용 또는 현대적 해석에서 지금까지 한국화가 안존해 있던 정신적인 세계를 과감히 탈피해 새로운 한국화의 경지를 열어 놓았다’라고 평가했다.

박생광은 사실 살아 있을 때 많은 명작을 남기고 한국과 일본 각종대회에서 입선도 하면서 화단의 격찬을 받은 작가다. 157cm라는 작은 키에 50kg도 안되는 왜소한 체격, 그리고 신산한 삶이었지만 백상기념관 등에서 개인전도 열고 국립현대미술관, 명동화랑, 중앙미술대전, 파리 그랑팔레 미술관 등에 초대받기도 했다. 홍익대 등 대학강단에 서서 제자들을 기르기도 했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1981년 5월 서울 백상기념관 개인전부터 그의 진가를 알기 시작했다. 이경성은 이 전람회에 들어선 순간 ‘커다란 힘에 눌려서 질식하고 말았다’라고 했다. 박생광의 77세 때 열린 개인전이었다.

박생광 미술의 특징은 크게 한국전통적 주제, 강렬한 색채의 향연, 강한 추상주의적 구조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무속화·불화·민화를 바탕으로 북종화·남종화라는 한국회화의 주류를 거부하고 독특한 한국화의 영역을 개척했다. 주류 한국화의 정적이고 담백한 흑백위주의 점잖은(?)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붉은 색을 주조(主調)로 하고 노란색·청색을 가미한 강렬한 색책의 긴장감을 즐겨 표현했다. 개별 인물과 사물의 구성요소를 해체하고 새롭게 조립하는 한편 서양식 원근법을 무시한 추상주의적 구조는 새로운 진채화(眞彩畵)를 성립시켰다(김원룡, 1981)

박생광 미술의 특징이 나타난 작품들은 황혼녘인 1980년 이후 많이 제작되었다. ‘토함산 해돋이(1981)’는 80년대 회화의 서막을 연 작품이다. 1981년 제작된 ‘청담대종사’ 시리즈는 고향 친구로서 진주농업학교를 같이 다닌 청담스님(속명 이찬호, 1902~1971)을 그린 것이다. 그 외 ‘십장생’ ‘무당’ ‘무속’시리즈, ‘꽃가마(1983)’, ‘무위사의 관음(1984)’, ‘탁몽(1984)’ ‘범과 모란(1984)’ 등이 걸작으로 남아 있다. 결정적인 작품은 ‘명성황후(1984)’와 ‘전봉준(1985)’이다.

‘명성황후(330cm×200)’는 1895년 양력 10월 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 공사 미우라의 지휘로 피살된 을미사변을 그린 작품이다. 화백이 직접 현장에 가서 스케치하고 복식 전문가에게 고증을 받기도 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키는 울부짖는 여인들 아래 소복차림에 연꽃을 들고 평온하게 누워 있는 명성황후를 그렸다. 용인 이영미술관(관장 김이환)에 전시되어 있는, 한국 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전봉준(508×359)’은 화백이 후두암 선고를 받고 타계하기까지 1년간 투병기간에 그린 역작이다. 전봉준이 압송되어 가면서 두 눈을 부릅뜬 모습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울부짖는 농민들과 소, 그리고 칼 들고 말 타는 일본군을 생동감있게 그렸다. 작가는 이 작품 이후 안중근, 윤봉길, 단군을 그리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곧 별세했다.

내고(乃古)라는 호는 ‘그대로’라는 뜻으로 화가 본인이 중국 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내고는 1945년 해방 직전 귀국하여 진주에 정착해 살면서 파성 설창수와 청동다방에서 시화전을 개최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1967년 서울로 이주하였고 1985년 서울 슈유리에서 별세했다. 화백의 노후 10년간 그를 보살피고 작품활동을 도와 준 진주농업학교 후배 김이환 관장은 화백이 후두암 항암치료에서 극도의 고통을 견디며 끝까지 그림을 위해 피 한 방울, 살 한 점까지 남김없이 바쳤다고 했다. 김 관장의 내고 교류기는 그의 책 ‘수유리 가는 길’에 잘 담겨져 있다. ‘색채의 마술사’ ‘민족혼의 화가’라 불리는 내고 박생광은 진주가 배출한 위대한 민족화가다.

하지만 진주혁신도시에 작가의 이름을 붙인 미술관에 건재해 있는 이성자 화백에 비하여 내고는 지역에서도 초라한 대우를 받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열린 내고 특별전의 전시관은 이성자미술관이었다. 이제 새롭게 내고를 인식할 때다. 내고의 많은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은 ‘수구초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주 영천강변에 워싱턴DC와 같은 박물관, 전시관 몰(mall)을 설립하는 희망이 있다. 내고는 영면하기 직전 화첩에 유명한 글을 남겼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의 전통 위에 있다.”


/최임식 한국토지주택공사 지역상생협력단장

 
최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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