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에게 묻다 [8] 합천시대(3)
남명에게 묻다 [8] 합천시대(3)
  • 임명진 기자
  • 승인 2019.11.26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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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벼리는 시퍼른 칼날을 품다

10여 차례 넘는 벼슬 제수 받았지만
뜻을 펼치기 어렵다 한사코 사양해
명종, 유비 삼고초려 빗대어 출사 권해도
“제갈공명도 결국은 뜻 못 펼쳤다” 거절
선생은 조정으로부터 10여 차례 넘게 벼슬을 하사받았지만 모두 물리쳤다.

선생이 벼슬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장과정에서 겪어온 여러 일련의 사건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명은 나이 38세에 조정으로부터 첫 벼슬을 제수 받았다. 태종대왕의 능을 관리하는 종9품 참봉직이었다. 고향 합천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에게는 계속해서 벼슬이 제수됐다. 그 뒤 하사받은 벼슬은 종6품으로 관직이 몇 계단 올랐지만 조정의 제사에 쓸 소와 돼지 등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전생서 주부였다.

51세에는 왕실족보를 관장하는 종6품의 벼슬이 내려졌다. 받았던 벼슬을 보면 헌릉 참봉, 전생서 주부, 사도시 주부, 예빈시 주부, 단성 현감, 상서원 판관 등의 벼슬이 차례로 제수됐다.

사도시는 궁중의 미곡과 장 등의 물건을 관리하고 예빈시는 종실과 재신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맡고 있는 부서다.

하나같이 남명이 가진 뜻과 포부를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남명에게는 벼슬은 내리되 받아들이기 힘든 관직을 제수한 셈이다.

이상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소장은 “당시에는 과거시험이 아닌 천거를 통해 벼슬에 진출하는 경우 요직을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강직하고 우직한 성품

남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기 힘든 이런 벼슬에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시각이다.

직언을 서슴지 않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한 남명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언론과 감찰기능을 하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적성에 맞았을 것이다.

눈길을 끄는 사례가 있다. ‘조선왕조 500년’ 드라마의 작가인, 신봉승 작가가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조선왕조의 인물로 정부내각을 구성해 화제가 됐다.

신 작가는 대통령에는 세종대왕을, 인조대에 명재상 이원익을 국무총리,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황, 통일부장관은 최명길, 법무부장관은 최익현, 국방부장관은 조헌, 행정안전부장관에는 이이 선생을 각각 추천했다. 그런데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는 감사원장에는 남명 조식을 지목했다.

통치자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한 남명의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그의 벼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회재 이언적’이 당시 경상도 감사로 부임하고 나서 남명에게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이언적은 몇 년 전 남명을 벼슬에 처음으로 천거한 인물이지만 남명은 단호히 거절했다.

자기를 중매하는 처녀가 없듯 자진해서 윗사람에게 보이는 선비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 사람 가운데 사대의 임금에게 벼슬했으면서도 실제 조정에서 근무한 날수는 겨우 40일 밖에 되지 않는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나리께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줄로 압니다. 그때 각건을 쓰고서 나리의 고향 안강리 댁으로 찾아뵈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자신을 관직에 추천한 고위벼슬아치를 만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마치 벼슬을 구하려는 듯 보이는 것 같아 거절했던 것이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당시 이언적이 임금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가선대부로 승진한 일이 있었는데 남명은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임금에게 충언을 하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인데, 그 능력이 출중하면 시기에 맞춰 적절히 인사를 하면 될 것이지, 바로 승진시키는 임금도 문제였지만 받아들인 회재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남명이 보낸 답장에는 아직도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느냐는 일종의 비판적 내용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주목할 점은 일면식도 없었던 퇴계 이황도 남명의 출사를 권했다는 점이다. 조정이 남명에게 전생서 주부직을 내렸을 때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을 맡고 있었다.

퇴계도 계속 출사를 사양하다 임금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며 1553년 벼슬에 나아갔다. 퇴계마저 남명의 출사를 권하는 편지를 보낼 만큼 남명의 출사는 당대 관심을 끌었다.

퇴계의 편지를 받은 남명은 숙고한 끝에 답장을 보냈다.

‘그대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셨는데 저는 항아리를 뒤집어 쓴 듯 아무런 식견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대에게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고 게다가 저는 몇 년 동안 눈병이 있어 사물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대에게 눈을 밝게 해주는 약이 있다면 제 눈을 좀 밝게 해주십시오’

여기 남명의 벼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남명은 벼슬에 나가는 것을 일신의 영달에 쫓아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뜻은 고맙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없어 벼슬에 나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눈을 밝힐 약을 있으면 달라고 한 구절이 그것이다.

허권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그만큼 남명은 벼슬에 나가는 것을 일신의 영달에 쫓아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남명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말년에 임금과 만나다.

남명의 우직함을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단성현감사직소를 올리며 명종과 갈등을 빚은 남명은 결국 명종의 부름에 응해 대궐에서 만나게 된다.

그때가 1566년. 남명의 나이 환갑이 지난 65세의 일이다. 문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윤원형 등 외척이 득세했으나 마침내 친정에 나선 명종은 이들을 제거하고 조정은 조금씩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때쯤 남명에게도 이제는 벼슬에 나갈 것을 권하는 이들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명종)가 민첩하지 못해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란 것 같소, 전날 비록 품계를 뛰어넘어 제수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대(남명)가 취임하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 매우 부끄러웠소. 지금도 초야에 묻힌 선비를 내가 간절히 구하고 있소. 그러니 날씨가 시원해지기를 기다려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시오.’-남명록

이번에는 궁중의 인장을 관리하는 상서원 판관, 종6품직에 제수했다. 남명의 벗인 성운도 이때 벼슬에 나아갔다.

남명이 병에 들었다고 알리자, 왕이 내의원에 명해 약을 지어 보냈다.

명종이 남명에게 내린 벼슬만 벌써 수차례. 계속되는 부름을 사양하는 것도 신하된 자로서 어려운 일이고 무엇보다 새롭게 친정을 시작한 명종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던 남명은 왕을 만날 결심을 한다.

남명이 명종을 알현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자 세상의 관심이 집중됐다. 회갑이 지난 나이에 직접 말을 타고 먼 여행에 나섰다.

함양과 전주, 공주를 거쳐 10월 초 서울의 나루터에 도달했다. 조정에 나아간 그의 제자, 오건과 정탁 등이 스승을 맞으러 나왔다.

남명은 초사흗날 베옷을 입고 드디어 명종에게 나아갔다. 베옷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입는 옷이다. 아직 사화의 기운이 남아 있었던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재야인사들이 많았다. 남명은 같이 벼슬이 제수된 김범 선생과 같이 명종을 만났다.

처음으로 남명을 만난 명종은 ‘통치의 도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남명은, “고금의 잘 다스려진 일이나 어지러운 일은 책에 다 나와 있으니 굳이 신의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정과 의리가 서로 부합되어 거리가 없어야만 더불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신하들을 친구처럼 대하여 그들과 나라를 다스릴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허심탄회하게 무슨 일이든지 의논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남명은 백성의 어려운 삶을 명종에게 있는 그대로 알렸다.

‘저는 먼 시골에 있어 세상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모릅니다만, 수십 년 이래로 백성들의 마음은 떠나 있고 군사들은 지휘를 따르지 않아 마치 물이 제 갈 길로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마을마다 텅텅 비어 폐허가 되어 있으니, 마치 집에 난 불을 끄듯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터인데도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어 남명은 “임금님께서는 늘 백성들을 걱정하시지만 폐단은 옛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하들이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 일을 처리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명종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유비의 삼고초려’에 대한 것이었다.

‘옛날 촉의 유현덕이 제갈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간 뒤에야 공명이 세상에 나왔는데 어찌 한 번 불러서는 나오지 않고 세 번 불러서야 나왔는가?’

명종은 유비의 삼고초려의 예를 꺼내 남명이 벼슬에 나와야 된다는 것을 지적했는데,

남명은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답했다.

‘공명으로서는 처음 찾아왔을 때 나오지 않은 것은 괜히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시세를 보고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만 유비와 제갈공명이 한의 부흥을 도모한 지 삼십여 년이나 되었는데도 천하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그가 세상에 나와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명은 때가 되지 않으면, 설령 벼슬에 나온다 해도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제갈공명에 빗대어 말했다.

명종과 남명의 만남은 이렇게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끝이 났다. 살아서 열 차례가 넘는 벼슬을 모두 사양했던 남명은 사후 선조가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을 내리고, 광해군 7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합천군 삼가면 토동마을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합천군 삼가면 토동마을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합천군 용암서원 앞에 있는 남명 선생의 비를 지나가는 관광객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합천군 용암서원 앞에 있는 남명 선생의 비를 지나가는 관광객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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