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꽃무릇
선운사 꽃무릇
  • 경남일보
  • 승인 2019.11.2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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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진주문협 상임이사·시인)
꽃도 실컷 보고 바람도 쐬자고 이웃한테서 전화가 왔다. 바로 이때 안 가면 안 될 것 같다고 그림자 짙은 목소리가 전화기에 내려앉는다. 이웃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갔다.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홀가분했다.

얼마 전,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 자신의 상황을 알려 도움을 청하고 밖으로 나가서 기분 전환을 해야 한다는 임시 치료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차에 오른 그녀의 옷차림은 온통 잿빛이었다.

나는 한창 붉고 환하게 피어있을 꽃무릇을 그려보았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영원한 사랑은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떠나간 사랑이라고 했다던가. 두 사랑이 화끈하게 타 올랐을 꼭짓점을 생각하며 운전대에 힘이 들어가는 내 손을 이웃은 꼭 잡는다.

두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선운사 주차장엔 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마흔에서 쉰 안팎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들로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을 훌훌 털고 나왔음을 알리는 듯하다. 이웃의 잿빛 나들잇벌에도 꽃물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며 옆을 돌아본다. 승선교 아래 흐르는 개울물에 꽃들이 얼비춰 그녀와 나란히 물길을 걷는다.

개울을 따라 내려오니 돌 틈에 꽃 한 송이가 물에 쓸려갈까 간신히 돌을 붙잡고 피어있다. 묵묵히 걷던 이웃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개울 속에 비친 꽃송이와 개울 밖의 꽃송이가 서로를 바라보는데 부처님의 화두처럼 법고가 울린다. 이웃의 눈언저리에 물기가 서린다. 나설 때 무슨 일 있느냐고 묻지 않은 것처럼 눈물이 어룽거리는 걸 아는 체 하지 않았다.

화두를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둘러서서 맑은 개울물 소리에 잠겨 자신을 내어주는 붉은 꽃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꽃과 하나가 되려고 몸을 낮추고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가까운 몸가짐으로 돌아갈 때 그제야 꽃은 고운 모습을 내어준다.

꽃무릇이 무리지어 있는 곳에 이르러 말을 잊은 사람 같던 이웃이 입을 뗀다. “그 사람이 헤어지자고 해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가 작고 오목한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까 개울 안에 피어있던 그 꽃도 여기 꽃처럼 살아가겠죠” 그녀의 볼우물에 슬픔이 고인다. 저녁 공양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산사에 울러 퍼진다. 그녀가 꽃숭어리에 안겨 다소곳이 양손을 모은다.
 
/이미화(진주문협 상임이사·시인)
 
이미화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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