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87)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87)
  • 경남일보
  • 승인 2019.11.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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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양왕용 교수가 쓴 이경순 시인의 생애-1
부산대 명예교수 양왕용 시인은 최근 ‘남강문학’ 2010년 제2호에 ‘청년기의 허무주의로 일관한 생애’라는 제목으로 동기 이경순 시인의 삶과 가족 관계를 심층 취재하여 썼다. 양교수는 남해군 창선면 상죽리 출생으로 창선중학, 진주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양교수는 김춘수 추천으로 월간 ‘시문학’(65- 66)에 ‘갈라지는 바다’, ‘아침에’, ‘3월의 바람’으로 등단하였다. 경남중학교, 부산진중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등에 교사로 일하다가 1976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취임했다.

아래부터는 양교수가 밝혀낸 이경순 진주 출신 시인의 이야기다.

동기(東騎) 이경순 시인은 1905년 11월 11일 진주시로 통합된 진양군 명석면 외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바로 윗형인 방의 즉 안익대군(安益大君) 17대손으로 부 이홍제씨와 모 백남성씨 사이의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구한말 궁내부 주사로 전국의 물레방아와 관개사업을 총괄하는 수륜원에 근무하다가 경술년 나라잃음과 더불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천석꾼 소리를 듣는 부자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는 13세때 장가를 갔다. 그러나 결혼 후 유복한 집안인 덕택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부인을 남겨놓고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3.1운동 직후인 그때에 상투를 자르고 도일한 그는 1924년 4월 1일 동경의 사립 주계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전문부 경제과에 진학하여 1927년 3월 20일 중퇴한다. 이 시기에 특기할 사항은 1928년 고향 진주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5개월간 미결수로 감옥생활을 한 점이다.

그의 회고기에 의하면 일본 어느 대학 2학년 되는 해에 일본 유인 천황 즉위식이 거행되기 한 달 전부터 사상이 과격한 한국 유학생을 예비검속하게 되어 그것을 피하여 친구이자 박열(朴列)사건과 관련된 정태성과 함께 진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동경농업대학 재학중인 홍두표와 함께 문산면 청곡사에 체류하면서 시를 쓴다는 핑계로 아나키즘을 연구하다가 진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 홍두표는 곧 면소되고 동기 시인과 정태성은 진주교도소를 거쳐 대구 복심법원까지 가서 풀려났다.

시인에게는 진주에서 검사가 징역 1년을 구형하였다. 그러나 판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였으나 검사의 항고로 대구까지 간 것이다. 대구에서도 역시 무혐의로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된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는 적을 두지 않고 일본인 친구들과 한국 유학생 연합체인 ‘흑색 청년연맹’, ‘자유연합’ 등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 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일본 문필가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 문예평론지 ‘흑색전선’, ‘니힐’등에 글을 쓰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니힐리즘과 아나키즘 방법론인 다다이즘을 체득하였으며 시인 북원백추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다. 이러기를 여러 해 지난 1940년 시인 자신은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회고하고 있으나 그 당시 35세나 되는 나이를 미루어 볼 때 다른 복합적인 이유로 포화시 동북치과의전에 입학하여 1942년 9월 22일 졸업한다. 그러나 이 치과의전 졸업장은 그를 해방직후 진주농림학교 축산과 위생교사의 길을 걷게 하였으며 교직은 해방 공간에서의 살아가는 경제적 방편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수성이 있어서 한문 서당에서 한시를 창작한 기억이 난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 같은 감수성은 일제 강점기에도 시를 발표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동기시인은 해방 직후부터 시를 발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다음과 같은 회고기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하기방학때 귀향해서 진주에 있던 김병호씨(당시 동경서 발행하는 문예사상지 ‘문예전선’에 시를 기고하기도 했다.) 소개로 어느 일간지에 ‘백합화’란 제목으로 쓴 시편을 발표하고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서 문학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문학을 할 수 있는 자유스런 정신 상황을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그해 동경 원병가에 있는 사상단체 흑우회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먼저 찾는 것이 이 나라에서 생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떳떳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어서 20년을 동경에서 지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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