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단배
돛단배
  • 경남일보
  • 승인 2019.12.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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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진주문협상임이사·시인)
배를 묶은 긴 놋줄을 잡아당겼다 놓으면 배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오른손 왼손 번갈아 줄을 잡으면 배가 슬쩍 뭍으로 가 닿고, 잡았던 줄을 놓으면 배는 또 물을 가르며 바다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두 소녀는 선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다. 소꿉놀이는 어느새 까맣게 잊고 뱃놀이에 흠뻑 빠져버렸다.

바닷가에 살던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과 갯벌에 매어져 있는 작고 예쁜 배를 골라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그날도 새로운 배를 발견하고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와 소라고둥으로 소꿉놀이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갯벌은 만조 시가 되어 서서히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하고 배가 물 위에 두둥실 뜨게 되었다. 두 소녀는 겁도 없이 신기한 뱃놀이에 한여름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얼마가 지났을까. 줄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더 이상 배가 뭍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묶어놓은 줄이 풀린 배는 매어져있던 곳의 반대 방향인 방파제가 있는 쪽을 향해 떠내려가고 방파제 너머엔 넓은 바다가 시퍼렇게 넘실거렸다. 오른쪽 방파제와 왼쪽 방파제 사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큰 악어 같아 두 소녀는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살려달라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옥수수 밭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집을 향해 양손을 흔들었다. 바닷가의 초저녁은 파도 소리에 묻혀 아무 것도 전해주질 못했다.

줄이 풀린 배가 방파제 옆 커다란 악어 입 가까이 다가가자 친구는 그만 바지에 오줌을 쌌다.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간 고전읽기 시간에 학교 도서관에서 보았던 ‘노인과 바다’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 힘들게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는 산티아고 노인의 상황과 같다고 느꼈을지도.

다행히 밤낚시를 나가던 동네 아저씨에게 발견되어 우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저녁도 굶은 채 엄마에게 혼이 났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삶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같이 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두 일 사이를 오가며 찬물과 뜨거운 물에 번갈아 들어가는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가 다시 식고는 했다.

살아오면서 줄이 풀린 돛단배처럼 방향을 잃고 흔들리며 떠내려가던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럴 때마다 산티아고 노인을 떠올렸던 열두 살 소녀를 불러내곤 한다.
 
/이미화(진주문협상임이사·시인)
 
이미화 시인
이미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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